출처: http://blog.naver.com/gsit/70011489363
1. 숫자의 속성 아세요? 자동차 영업 사원이 고객을 만납니다.
l A: 이 차 무지 커요. 딱 봐도 크게 느껴지죠? 시동 키고 달려나가면 쒸웅하고 얼마나 잘 나가는데요. 옆의 차들 못 쫓아온다니까요. 타본 사람들 얘기 들어보셨어요? 다 좋다고 그러죠? 가격도 제가 힘 좀 쓰면 다른 곳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 드릴 수 있어요.
l B: 전장 4,800mm에 전폭은 1,830mm으로 동급 최대의 실내 공간입니다. 137마력의 출력과 19.5㎏.m의 토크니까 힘 좋은 건 아시겠죠? 소비자 인기 투표에서 3년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인기 좋으니 나중에 중고차 가격도 다른 차보다 10퍼센트는 더 받을 수 있습니다. 가격도 다른 곳에 비해 최고 10퍼센트까지 싸게 드릴 수 있고, 할부 기간도 6개월 더 연장해드릴게요.
A와 B 둘 중 누구에게 차를 사시겠어요? 현명한 소비자라면 당연히 B를 선택합니다. B에게 더 믿음이 가기 때문, 또 확실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왜 B의 말에 더 믿음이 가는 걸까요? B의 말 속에는 9개의 숫자가 나오지만, A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숫자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확실함을 심어줍니다.
설령 그 숫자가 정확하지 않아도 별 상관 없습니다. 일일이 그 숫자를 다 확인해보는 소비자는 별로 없거든요. 출력, 토크 같은 어려운 용어 나오면 그냥 넘어가고 숫자만 맹신합니다. 일반적인 소비자는 대체로 이런 모습이죠.
사전 하나를 사도 이것 저것 따져보는 영어 시장의 소비자들은 과연 어떨까요? '숫자'에 대한 맹신, 영어 시장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2. 시험하면 늘 따라 다니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 시험 날짜, 시험 범위, 시험 점수
혹시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보이나요? 이렇게 적어볼게요.
l 시험 날짜
시험 범위 13과 ~ 15과
6 문제 틀렸다
결과 시험 점수 82점
그래서 반에서 9등
이제 보이죠? 시험 영어는 온통 숫자뿐입니다. 모든 것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죠. 안 그러면 그 시험의 신뢰성은 떨어집니다. 시험은 날짜, 범위, 점수에서 보았듯 숫자와 친합니다. 그래서인지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 역시 확실한 광고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A보다는 B 광고가 더 잘 먹힙니다.
l A: 여러분의 진정한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한 수업입니다.
B: 현재 점수에서 3달 내에 200점 올려드리는 수업. 지금 등록하세요.
시험 날짜가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조급해집니다. 그 날짜 전에 원하는 구체적인 성과가 나와야 하거든요. 이렇게 조급해하는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믿음을 주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책들이 잘 팔리는 게 당연할 지 모릅니다.
l 뉴스 청취 6개월 완성
문법, 한 번만 읽으면 끝난다
영어 문장 100개만 외우면 말문이 트인다
필수 어휘 22,000
하루 30분 투자로 영어 회화 끝
토익 한 달 만에 200점 올리자
숫자가 안 들어가면 큰일 날 정도. 그런데, 숫자로도 부족한지 한 술 더 떠서, '완성'이나 '끝'이라는 단어까지 갖다 붙이곤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어우러지면 정말로 '확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문구가 완성됩니다. 확신에 가득 찬 그런 문구를 보면서, 영어 마지막으로 본 게 10년 전인 사람도 "대충 여섯 달 정도 하면 뭔가 끝낼 수 있지 않을까?" 같은 허황된 생각을 갖게 될 정도죠.
소비자 입장에서는 '불확실한' 상품 보다는 '확실한' 상품 쪽에 끌리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상품도 상품 나름입니다. 영어라는 상품은 근본적으로 '확실함'과는 어울리지 않거든요.
언어의 기본적인 속성이자 언어의 최대 매력은 '불확실성'이기 때문입니다.
3. 시험 영어의 궁극적인 목표는 확실하게 답을 맞추는 것. 확실하지 않으면 존재 의미가 없는 게 시험 영어에요. 그러나 실전 영어는 정반대, 그 속성이 '불확실성'입니다.
상담 중에 많이 하는 질문 두 가지 - "영어 얼마나 잘 하세요?" & "영어 어떻게 하셨어요?"
'말'로서 영어를 익혀온 사람은 확실한 답이 금방 안 나옵니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할 지 고민하죠. 반면 '공부'로 영어를 익혀온 사람은 이렇게 확실한 답을 줍니다 - "토익 850점이에요" & "토익 공부 한 1년 했고, 회화 학원 여섯 달 다녔어요."
시험 영어에 찌든 사람들이 잘 하는 말 몇 개 더 적어볼게요.
l 이 책 몇 번이나 봐야 하죠?
몇 달 수업 들으면 다음 수업 올라가죠?
하루에 단어 50개씩 외우고 있어요.
지난 번에 비해 점수가 80점이나 올랐어요.
모두들 딱 부러지는 느낌의 말들입니다. 위에 나온 말을 한 번 합쳐볼까요?
l "매일 단어 50개씩 외우면 두 달 후에는 점수가 몇 점이나 올라갈까요?"
'5+7=12' 처럼 뭔가 확실한 답을 요구하는 산수 문제 같은 느낌입니다.
반면에 영어를 '말'로 생각하는 실전 영어는 시험 영어와 비교해보면 흐리멍덩한 모습이에요. 왼쪽이 시험 영어, 오른쪽이 실전 영어의 모습입니다.
l 이 책 몇 번이나 봐야 하죠? || 자기가 재미있으면 보고 그렇지 않으면 안 봄
몇 달 수업 들으면 다음 수업 올라가죠? || 직접 수업 들어보고 상황 봐가면서 결정
하루에 단어 50개씩 외우고 있어요. || 외우는 것 자체를 잘 안 함
지난 번에 비해 점수가 80점이나 올랐어요. || 오르면 좋지만 점수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음.
단순히 시험 점수 올라가는 게 아니라 '말'로서의 영어 실력 향상을 원한다면 '확실함'을 버리세요. 뭔가 확실하게 선전하는 건 멀리 하세요. 언어는 그 속성 상 '불확실'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4. 만약 언어에 불확실의 요소가 없다면?
오해로 인한 말다툼,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러나 문학 작품이나 노랫말이 주는 맛이 전혀 없겠죠. 누군가에게 들은 말의 정확한 의미를 놓고 밤새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유명한 속담 '말 한 마디에 천냥 빚 갚는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같은 건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인가요? '불확실한' 언어야 말로 기계와 인간을 구별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 아닐까요? 태생이 불확실한 영어를 자꾸 뭔가 확실한 쪽으로 정리한 후에 한꺼번에 외워버리려는 영어. 이런 영어는 늘기 힘들어요.
실전에서 강해지려면 '불확실성'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할 거 미리 다 정해놓고 대화하지는 않으니까요.
5. 영어의 '불확실성'을 잘 보여주는 몇 가지.
l 철자만 봐서는 발음을 알 수 없다
철자만 보고 대강 발음할 수 있는 다른 언어에 비한다면 영어는 이 점에 있어서는 빵점인 언어. 영어 발음은 사전을 찾아 확인해야 합니다. 확실한 발음 규칙 하나 없는 영어. 발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불확실'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 영어에요.
이걸 가지고 학교 시험은 객관식 문제를 내서 학생들을 괴롭히죠. "다음 밑줄 친 부분의 발음이 나머지 셋과 다른 것은?" 이렇게요. 시험 문제로 이렇게 나오니 발음이 불확실한 게 짜증나는 겁니다. 그러나 영어를 좋아하게 되면 발음이 불확실하다는 부정적인 측면보다도 "이거 발음은 어떻게 하지? 궁금하네"가 됩니다. '불확실성'을 즐기는 거죠.
l 일반적인 단어는 품사의 제약이 없다.
어렸을 때 단어장 정리하면 항상 품사를 같이 적곤 했습니다. 'water: 명사. 물' 이런 식으로. 그러나 water를 더 보다 보면 품사 제약 없이 동사로 나오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어떤 하나의 확실한 품사가 없는 거죠. 물론 그렇지 않은 놈들도 있습니다. stratosphere(성층권) 같은 단어. 이렇게 확실하게 품사를 말할 수 있는 단어는 제일 쉬운 단어에요. 이런 걸 어려운 단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영어 할 때는 무엇이든 확실하게 정의를 내리지 않고 가는 게 장기적으로는 더 편합니다. 처음 외운 것과 다른 품사로 나온다고 짜증내지 말고, 그런 '불확실성'을 즐기세요.
l 하나의 단어는 어떤 문장에 오느냐에 따라 뜻이 수시로 바뀐다.
영어 단어는 카멜레온 같죠. 문맥에 따라 그 뜻이 시시각각 변합니다. 나중에 단어 할 때 말하겠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단어는 stratosphere(성층권) 같이 죽을 때까지 하나의 뜻으로만 나오는 명사들입니다.
반대로 가장 어려운 단어는 문맥이 없으면 도저히 뜻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사용되는 단어들. get, have, take, good 같은 단어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실전 영어와 시험 영어의 차이가 여기서 또 나오네요. 제일 쉽고 어렵다는 단어가 서로 정반대.
l 하나의 문장 역시 문맥에 따라 뜻이 바뀐다. 같은 말이 칭찬이 될 수도 조롱이 될 수도 있다.
"잘했다" - 우리말도 이렇게만 듣고는 칭찬인지 꾸중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문맥이 있어야 정확한 의미가 나옵니다.
"Thank you" - 쉬워 보이는 이 문장도 상황에 따라서, 고맙다는 말도 되고 "별 말씀 다 하시네요" 혹은 "제가 뭘 했다고 그러세요?" 정도의 의미로 나올 수도 있어요.
이렇게 언어의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예를 들자면 책 몇 권을 써도 모자랍니다. 시험 영어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실전 영어의 특징이 뭔지 아세요? 실전 영어 쪽 사람들은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영어에 빠져든다는 겁니다. 'A=B' 이렇게 확실하게 나오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게 실전 영어에요.
l 언어에는 '끝'이라는 개념이 없다. 언어는 평생 학습이다.
언어의 불확실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언어의 속성은 바로 이거겠죠. 언제까지 얼마나 하면 된다는 기약이 없습니다. 그냥 하염없이 가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말을 언제까지 끝내겠다는 생각 없이도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그게 언어 학습입니다.
있지도 않은 '끝'을 보여주겠다는 광고들. 계속 믿을 건가요?
[글 지은이 소개]
개인적으로 이 분께서 하시는 말씀에 100% 공감합니다~^^
너무나도 좋은 글이기에 블로그에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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