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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의 난폭자" 찰스 바클리

JJun ™ 2006. 2. 20. 20:00

2월 20일 오늘은 찰스 바클리의 43번째 생일이다. 은퇴한지 6년이 넘었지만 바클리는 오늘날까지 198cm의 신장으로 NBA의 골밑을 호령한 선수 , 최고의 선수였지만 늘 2인자에 머물렀던 선수 , 거친 입담과 재치로 팬들을 웃긴 선수로 선명히 기억되고 있다. 그가 농구팬들에게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의 발자취를 돌이켜보자.

불우한 어린 시절

바클리는 1963년 2월 20일 앨라바마주의 시골 리즈에서 태어났다. 19살 때 바클리를 임신한 그의 어머니는 스무 살 때 동년배의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녀는 생계비를 벌기위해 웨이트리스등 허드렛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바클리는 할머니에 의해 키워졌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바클리는 소년시절 갱단에서 활동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가정교육만큼은 엄격하게 받았다고 한다. 결국 ‘갱단을 그만두라.’는 할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풀기위해 대신 농구공을 잡았다. 바클리가 성공한 후 유독 흑인들의 교육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것도 자신의 이런 환경 탓이었다.

프로선수가 되기까지

고등학교 1학년 때 바클리는 170cm에 불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농구장학생만이 유일한 살 길이었던 바클리는 매일 110cm 높이의 울타리를 뛰어 넘는 등 피나는 노력을 통해 점프력을 길렀다고. 2학년 때 185cm까지 성장한 바클리는 그때서야 팀의 주전 포인트가드를 맡을 수 있었다. 바클리가 거구임에도 드리블 , 볼핸들링 , 패스 , 시야가 탁월했던 것은 농구를 가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3학년 때는 190cm , 113kg의 당당한 체격을 갖춰 포워드로 전향했고 무려 평균 17.9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그 결과 오번대학에 농구장학생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바클리는 대학시절 무려 122kg의 체중을 자랑하며 ‘리바운드를 하는 작은 산’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84년 3학년 때는 마이클 조던 , 패트릭 유잉과 대학생으로서 LA 올림픽 국가대표에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다. 하지만 역시 한 성질 하는 바비 나이트 감독에게 반항한 결과 중도 탈락되는 비애를 맞기도 했다.

이후 바클리는 역사상 최고의 드래프트였던 84년 드래프트에서 당당히 5순위로 필라델피아에 지명되며 프로데뷔를 한다.

이 보다 더 운이 없을 수는 없다!

바클리가 데뷔할 당시 필라델피아는 모제스 말론 , 줄리어스 어빙 , 모리스 칙스 , 앤드류 토니 , 바비 존스등 올스타급이 즐비한 명문팀이었다. 특히 바클리는 모제스 말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고, 말론도 바클리에게 리바운드 비법을 전수해주며 애정을 과시했다.

바클리는 프로데뷔 후 득점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또 리바운드도 변함없는 위력을 발휘한 결과 87년에는 14.6개로 리바운드 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2년차 시즌부터 11시즌 연속 20-10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슈퍼스타 반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줄리어스 어빙이 은퇴하고 말론이 이적하면서 필라델피아는 바클리의 원맨팀으로 굳어졌다. 바클리가 직접 수비리바운드를 걷어내 ‘coast to coast’ 드리블을 한 후 덩크까지 내려찍는 장면은 당시 필라델피아의 암울한 상황을 단 번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번번이 우승에 실패한 바클리는 감독과 동료들에게 점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는 일이 잦아졌다.

결국 바클리는 92년 8시즌 만에 피닉스로 트레이드 된다. 피닉스는 바클리를 얻기 위해 제프 호나섹
, 앤드류 랭 , 팀 페리 무려 3명의 선수를 내주는 엄청난 출혈을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대성공이었다.

피닉스 이적 후 바클리는 평균 25.6점 , 12.2리바운드 , 5.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리그 최다이자 프렌차이즈 최다승인 62승 20패로 이끌었다. 시즌 MVP도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LA 레이커스 , 샌안토니오 , 시애틀을 힘겹게 물리치고 결승까지 진출해 첫 우승의 꿈을 꾸었다.

하지만 바클리는 억세게 운이 없는 선수였다. 마이클 조던과 동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조던은 84년 대표시절 이후 바클리의 절친한 친구였지만, 선수로서는 늘 그의 앞을 가로막는 존재였다. 조던은 93년 파이널 평균 41.0점(역대최고)을 기록하며 바클리의 우승 꿈을 앗아갔다. 피닉스는 잘 싸웠지만 파이널 6차전 종료 3초를 남기고 2점차리드를 지키지 못한 채 존 팩슨에게 3점슛을 맞고 끝내 무너졌다.

이후 바클리는 조던의 야구외도로 인해 결정적인 우승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등부상과 무릎부상이 그의 엄청난 운동능력을 앗아갔던 것. 결국 바클리는 더 이상 결승전에 진출하지 못했다.

96년 바클리는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서 자신을 무너뜨린 하킴 올라주원의 휴스턴으로 이적했다. 자신의 상징과도 같던 등번호 ‘34번’까지 내주는 등 우승을 위해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결단을 내린 것. 하지만 이번에는 서부 결승에서 존 스탁턴의 결정적인 3점슛 한 방에 또 다시 모든 것이 무너졌다.

98년에는 최소 연봉을 감수하며 스카티 피펜의 영입을 도왔지만, 그와의 불화로 또 다시 우승 꿈을 접어야 했다.

바클리는 99년 12월 9일 친정팀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 정강이 근육이 파열되며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바클리는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농구를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 남에게 부축한 채로 코트를 떠나는 것은 싫다!”고 말해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결국 바클리는 4개월이 넘는 재활 끝에 코트에 복귀, 1경기를 뛰며 2득점 , 1리바운드 , 1블록슛을 기록한 후 당당히 자신의 발로 코트를 떠났다. 이후 바클리는 2001년 마이클 조던과 함께 선수로 복귀하기 위해 운동을 했었다. 하지만 다이어트 실패로 인해 그 꿈을 접었다.

역사상 가장 독특한 선수

바클리를 회자할 때 가장 먼저 기억에 남는 것은 그의 독특한 스타일과 신체구조일 것이다. 198cm , (농구화를 신고 잰 신장이 195cm에 불과하다는 증언도 여럿 있었다.) 114kg의 뚱뚱한 체격조건은 농구선수보다는 풋볼선수에 어울릴법하다. 하지만 바클리는 몸매에 걸맞지 않는 탁월한 스피드로 항상 속공의 최전선에서 뛰는 선수였다.

바클리는 전투적인 근성과 몸싸움 능력을 바탕으로 NBA최고의 득점원이자 리바운더로 군림했다. 특히 198cm의 신장으로 리바운드왕까지 해낸 것은 경이적인 일. NBA 역사상 2미터가 되지 않는 신장으로 리바운드타이틀을 따낸 선수는 53-54시즌의 할리 갈라틴과 바클리밖에 없다.

바클리는 외곽슛 감각도 좋아 3점슛까지 곧잘 성공시켰었다. 또 시야와 패싱감각도 좋았다. 툭툭치는 포스트업 후 외곽으로 빼주는 킥아웃패스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 드리블 실력도 출중해 크로스오버 드리블에 이은 비하인드 패스까지 종종 선보였었다. 그야말로 만능포워드였던 것. 지금으로 치면 케빈 가넷의 다재다능함에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의 폭발력을 두루 갖췄다고
평할 수 있다.

미워할 수 없는 악동

바클리는 뛰어난 농구실력뿐만 아니라 뛰어난 입담과 쇼맨쉽 , 카리스마 , 돌출행동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동료들을 때리기도 했고 심판에게 침을 뱉기도 했다. 또 언론에도 거침없는 발언을 마다하지 않아 팀관계자들을 긴장시키는 한편, 팬들과 기자들을 즐겁게 했다. 바클리는 무려 13년 연속 올NBA인터뷰팀에 선정되었다.

물러서지 않는 전투근성으로 싸움도 참 많이 했다. 특히 ‘배드보이즈’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는 빌 레임비어의 팔꿈치에 맞아 눈 부위가 찢어졌었다. 하지만 퉁퉁부은 눈으로 곧바로 코트에 돌아와 상대편의 기를 질리게 하기도. 데니스 로드맨 , 찰스 오클리 , 앤쏘니 메이슨 , 샤킬 오닐 , 릭 마흔 등 내로라하는 싸움꾼과의 대결에서도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내가 먼저 싸움을 걸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라고 밝히기도.

코트 바깥에서도 기행을 멈추지 않았다. 아내를 폭행하기도 했고 술집에서 시비가 붙은 사건은 이루 헤아리기도 힘들다. 대식가로 유명해 ‘빵트럭’ , ‘피자타워’ , ‘인간냉장고’등 다양한 별명을 가지고 있다. 다이어트 비결을 묻는 질문에 대해 “하루 식사를 6끼로 줄였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또 마돈나와의 스캔들로 연예신문에도 이름이 오르내리는 등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실력 , 재치 있는 입담과 천진난만한 미소로 국내에도 많은 팬층을 가지고 있다. 특히 경기 중 동료들을 지휘하는 카리스마는 단연 압권. 동료들이 결정적인 플레이를 해냈을 때 그를 무등 태워서 코트를 한 바퀴 돌았던 ‘세리머니’는 팬들의 열광을 자아냈다.

또 심장병에 걸린 소녀의 사연을 듣고 수술비를 쾌척하는 등 자선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었다. 워낙 사교성이 좋아 선수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은 선수였다. 바클리를 아는 측근들은 한결같이 ‘바클리가 가진 나쁜 이미지는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코트 밖에서는 온순하고 재미있는 친구’라고 입을 모은다.

농구는 쉬지만 입은 쉬지 않는다!

바클리는 현역시절 리바운드왕(87년) , 올스타 MVP(91년) , 올림픽 금메달 2개(92 ,96년) , 올림픽 득점왕(92년 , 평균 18점)등 거의 모든 것을 이룬 선수였다. 통산 2만점 , 1만 리바운드 , 4천 어시스트 이상을 해낸 선수는 윌트 채임벌린 , 카림 압둘자바 , 칼 말론과 바클리밖에는 없다. 하지만 우승이 없었다는 유일한 오점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무관의 제왕’으로 남아있다.

바클리는 은퇴 후 자신의 특기인 입담을 살려 농구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많은 저서활동을 통해 특히 ‘흑인들의 인권문제’에 대해 많은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심지어 공화당에서는 바클리의 대중적인 인기와 문제의식을 높이 산 나머지 주지사 출마를 제안하기도 했다.

최근 바클리는 다미닉 윌킨스 , 딕 바이텔등과 농구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올랐다. 선수 은퇴 후 5년이 지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 바클리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포함되지 않은 명예의 전당은 이미 명예의 전당이라고 부를 수가 없기 때문.

최고의 실력과 카리스마로 90년대 ‘NBA 인기몰이’에 한 축을 담당했던 바클리. 명예의 전당 헌액을 통해 그의 업적이 후세에도 영원히 기억될 수 있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