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를 보신지 오래된 올드팬이나 약간의 상식이 있으신 분들은 '샘 보위'라는 이름을 기억하실겁니다. 사상 최고의 드래프트로 꼽히는 1984년의 드래프트에서, 마이클 조던에 앞서 지명된 두명중의 한명의 이름이니까요. 비록 지금은 거의 잊혀져 대체 어떤 선수이길래 그 대단한 조던의 앞에 지명되었느냐는 의문을 가지실 분이 계실수 있겠습니다만, 당시 2번 지명권을 가졌던 포틀랜드 구단으로써는 조던과 겹치는 포지션에 이미 드렉슬러라는 걸출한 가드가 있었기에, 팀으로썬 절실한 빅맨이었던 보위를 뽑은것은 용서해 주어야 할것 같습니다. 그리고 켄터키 대학 시절의 보위는 충분히 가능성있는 빅맨이었으니까요. 만약 부상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분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전설적인 84년 드래프트의 영광의 1번픽은 오늘의 주인공인 하킴 올라주원에게 돌아갔습니다. 조던과 함께 90년대를 풍미하던 명 센터이자 그의 이름처럼 항상 정상의 자리에서 군림하던 센터였던 그를, 역시 우리는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던이 남긴 업적과 단순비교하기에는 힘들지만, 올라주원 역시 리그에 당당히 자신의 족적을 남긴 최고의 센터임에는 분명하니까요.
축구선수를 꿈꿨던 나이지리아의 한 소년은 첨단 우주 산업의 메카, 텍사스의 휴스턴에 발을 디디게 됩니다. 자신의 큰 신장과 긴 팔에, 그리고 농구선수로써 정상에 서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말이죠. 우연찮게도 그의 이름은 '항상 정상에 자리한다'는 뜻이었고 그 이름처럼, 그의 아메리칸 드림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나이지리아의 라고스에서 6자녀중의 세째로 태어난 그는, 원래 축구팀의 골키퍼로써, 그리고 핸드볼팀에서 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친구가 농구팀에서 뛰어주지 않겠냐는 부탁을 했을때인 15세때에야 그는 농구공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메리칸 드림의 시발점이 되었죠.
2년 후, 그는 휴스턴 쿠거스의 플레이어로써 미국에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82년 NCAA 토너먼트에서, 드렉슬러-올라주원의 휴스턴대는 맹위를 떨치지만 4강에서 제임스 워시와 조던이 이끌던 노스캐롤라이나 타 힐스에게 일격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해, '슬래머재머' 로 일컬어지는 고공농구로 휴스턴 쿠거스는 결승에 진출하지만, 언더독 팀이었던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에 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올라주원은 NCAA의 리바운드, 블록슛, 필드골 성공률에서 수위를 달리며 올 아메리칸 1ST 팀의 일원으로 뽑혔고 다시금 쿠거스를 결승에 진출시킵니다. 그러나 패트릭 유잉이 이끌던 조지타운 호야스에 패하며, 3년 연속 NCAA 토너먼트에서의 우승도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로터리 드래프트가 시작되기 딱 1년 전이었던 1984년, 휴스턴 로켓츠는 1번 픽을 행사하게 되고 물망에 오르던 빅맨 올라주원과 조던 사이에서 올라주원을 뽑게 됩니다. 전년도에 이미 7-4의 거인, 랄프 샘슨을 뽑았던 로켓츠로써는 '트윈타워'라는 공포의 로 포스트 진영을 구축하게 된 것이죠. (여기서 잠시 랄프 샘슨에 대해 알아보면, 그는 데뷔후 부상을 당하기 전인 첫 3년간 20점-11리바-3어시-1스틸-2블록을 기록했던 훌륭한 선수였습니다. 여기에 올라주원이 가세했으니, 당시의 상대팀들은 정말 속이 다 타들어갔겠죠)
올라주원은 신인시절 20.6득점-11.9리바-53.8% 필드골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신인왕은 타지 못했습니다. 다른 해였다면 충분했을텐데 말이죠.(그럼 그해의 신인왕이 누구냐구요?^^;;) 그리고 트윈타워는 1970년의 윌트 체임벌린과 엘진 베일러의 평균 20득점-10리바 콤비 이후 최초로 20-10 콤비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몇년만 트윈타워가 이어졌다면 분명 역사는 다시 쓰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항상, 아쉽지만 가정은 가정일 뿐이죠.
트윈타워의 화력은 85-86시즌에 드디어 만개했습니다. 샘슨의 극적인 위닝샷으로 레이커스를 물리치고 처음으로 NBA파이널에 오르게 된 것이죠. 당시의 상대는 래리버드-케빈 맥헤일-로버트 패리쉬의 빅 3가 이끄는 셀틱스였고 트윈타워는 빅 3에 대항하기에 조금 모자랐습니다. 6게임만에 셀틱스가 시리즈를 가져가고 트윈타워는 다음해를 기약해야 했죠.
그러나 기대를 모았던 86-87시즌, 샘슨은 부상에 시달리다가 워리어스로 트레이드되었고 올라주원의 개인기록은 상승하지만 팀의 성적은 5할 언저리를 왔다갔다하게 됩니다. 팀은 87년의 서부 준결승을 끝으로 1991년까지 매년 플옵 1라운드에서 탈락하였습니다. 올라주원은 이 기간동안 거의 전 부문에서 팀을 리드하였으며 두번의 리바운드왕, 두번의 블록슛왕을 차지하며 개인기량을 마음껏 뽐내게 됩니다. 그리고 사상 3번째로 쿼드러플 더블을 기록하기도 했죠.
그러나 올라주원의 승리를 향한 갈망에도 불구, 팀의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91년 드래프트 동기인 조던의 시카고가 처음으로 우승컵을 가져갈 때 올라주원의 로켓츠는 플옵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물론 올라주원 개인으로써는 최정상의 기량을 보여줬지만 말이죠. 91년은 올라주원 개인적으로도 불운의 해였습니다. 시카고의 센터 빌 카트라이트의 팔꿈치에 눈부상을 당하고, 또한 불규칙 심장박동을 겪게 됩니다. 그로인해 56게임밖에 뛰지 못하였죠.
1992년, 당시 5할 승률로 팀을 이끌던 감독 돈 체이니가 떠나고 루디 톰자노비치가 새로 감독을 맡으면서 로켓츠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게 됩니다. 비록 성적은 톰자노비치 체제에서도 16승 14패로 그럭저럭이었지만, 팀의 시스템 변화에서 비롯된 일이었기에. 로켓츠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톰자노비치는 수비를 강조하는 동시에 올라주원의 농구 마인드를 일깨워주었고 드디어 1993년, 팀은 55승을 올리며 디비젼 우승을 차지하였고 서부지구 준결승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올라주원은 26.1득점-13리바-4.17블록-3.5어시스트의 기록으로 MVP투표에서 찰스 바클리에 이어 2위를 차지합니다.
예전의 올라주원의 농구 마인드는 이랬다고 합니다.
'항상 필드골 성공률이 50%가 넘는 내가 왜 40%밖에 안되는 동료에게 패스해야 하는가?'
그러나 팀이 우승하기 위해서는 팀 플레이가 필요하다는것을 깨달은 올라주원은 1992년까지 두개 언저리에 맴돌던 어시스트를 93년에는 3.5개로 대폭 상승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며 드디어 우승에 한발짝 다가서게 됩니다.
93-94시즌, 올라주원은 27.3득점-11.9리바-3.6어시-3.7블록-1.6스틸이라는 전방위에 걸친 뛰어난 활약으로 MVP와 올해의 수비선수상을 동시에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로켓츠는 포틀랜드를 3-1, 피닉스를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꺾고 유타 재즈와의 서부 결승에서도 4-1로 승리하며 대망의 결승에 올라가게 됩니다. 상대는 조던의 공백을 딛고 드디어 결승에 올라선 닉스였으며 시리즈는 동서를 양분하던 4대 센터인 올라주원과 패트릭 유잉의 첫 우승 반지를 건 명승부였습니다.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던 6차전, 스탁스의 동점을 노린 3점슛을 블록하며 경기를 끝낸 올라주원은, 시리즈 내내 29점-9리바-3.86블록을 기록하며 센터농구의 진수를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7차전에서 승리는 로켓츠의 것이 되었고 세기의 센터대결의 승자는 올라주원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라주원은 MVP-수비왕에 이어 파이널 MVP까지 독식하는 최고의 한 해를 보내게 되었죠.
94-95시즌에 로켓츠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전년도 우승의 숨은 살림꾼, 파워포워드 오티스 도프가 포틀랜드로 떠나고 포틀랜드의 심장이었던 대학 선배인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가세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무관의 제왕이었던 드렉슬러는 선수생활의 황혼기에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었죠.
비록 MVP는 로빈슨에게 넘겨주었지만 올라주원은 작년 못지 않은 압도적인 기록을 남겼으며 로켓츠의 올타임 득점 리더였던 캘빈 머피의 기록을 넘어섭니다. 팀은 서부 6위에 그치는 부진한 모습이었지만,(47승)플옵에서 올라주원-드렉슬러 콤비를 앞세운 로켓츠는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일들을 연속으로 일궈내었습니다.
60승의 유타재즈를 3-2로 물리치고, 59승의 피닉스를 4-3으로 물리치고, 62승의 스퍼스를 4-2로 물리치는 대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스퍼스와의 서부 결승전에서는 MVP 상대인 로빈슨을 거의 농락해버리는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었죠. 작년에 이어 다시금 결승에 오른 로켓츠는, 괴물 오닐과 하더웨이가 이끄는 동부의 신흥강호, 매직과의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오닐은 28득점-12.5리바-6.3어시스트라는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올라주원은 33점-11.5리바-5.5어시스트로 그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차전에서 매직은 패기있는 모습으로 시종일관 로켓츠를 압박해 나갔지만, 믿기지 않는 닉 앤더슨의 4연속 자유투 실패로 게임은 연장에 돌입하고, 드렉슬러의 미스샷을 올라주원이 버져비터 팁인샷으로 연결하며 시리즈는 휴스턴의 스윕으로 끝나버립니다. (게다가 4차전, 올라주원은 로케츠의 승리에 쐐기를, 그리고 매직팬들의 가슴에 말뚝을 박는 3점슛을 성공시키기도 했죠) 그리고 올라주원은 결승에서의 믿을수 없는 활약으로 작년에 이어 연속으로 파이널 MVP가 되었으며 무관의 제왕, 드렉슬러에게 반지를 선물하게 됩니다.(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었죠)
커리어의 대부분이 겹치는 마이클 조던이 완벽하게 돌아온 96년 이후, 우승은 다시금 시카고의 것이 되었고 올라주원의 로켓츠는 젊은 패기로 무장한 페이튼-켐프의 시애틀, 그리고 무르익은 픽&롤 콤비의 유타에 2년 연속 무너지며 황금시대의 종말을 고하였습니다. 그렇게 올라주원의 타오르던 시절도 조용히 사그라들고 말았죠.
그는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 유명합니다. 이슬람교의 라마단 기간과 경기가 겹치는 날에는 그는 단 한방울의 물, 심지어 침조차 삼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통의 신자들도 잘 지키지 않는 의식을 말이죠. 게다가 그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에너지와 수분을 필요로 했던 운동선수이자 센터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는 라마단 기간의 플레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여전히 폭발적인 에너지가 넘친다고 스스로 느낀다. 해가 지고 휴식시간이 올때, 그때 먹는 물의 맛은 더없이 각별하다.'라고 말이죠.
사실 이 글을 쓰기 전에 올라주원의 기부금이 테러단체로 흘러들어갔다는 뉴스때문에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사실 글이 늦어진 이유도 어느정도는 그 뉴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부대와 민간인이 테러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에서 긁어부스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실한 신자로써, 자신의 종교에 기부하는것은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아는 일이지요. (저는 다만 90년대의 센터이야기를 연재하면서 과연 올라주원이 빠진 센터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종교나 정치와 같은 일들은 저는 잘 알지도 못하고 의견을 피력할 능력이나 이유도 없습니다.)
오픈 상태에서 마이클 조던이 공을 잡으면 과연 어떤 덩크를 보여줄것인가 가슴설레었던것처럼, 올라주원이 페인트존 근처에서 공을 넘겨받으면 자연스레 가슴이 설레었던 기억이 납니다. 운동능력이 뛰어난 가드나 포워드에 비하여 대체로 뻣뻣한 플레이를 보여주던 센터 포지션의 한계, 올라주원은 그 한계를 허물어버린 위대한 센터입니다. 조던이나 드렉슬러가 보여주던 우아한 공중동작을 저는 올라주원의 현란한 골밑동작에서 보았으며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드림쉐이크는 지금껏 그 어느 센터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창조적인 플레이였습니다. 그가 상대한 4대 센터중의 하나인 데이비드 로빈슨은, 라이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Q:'올라주원에 대한 해법이 있는가?'
A:'없다, 하킴은 막을 수 없다.'
또한 샤킬 오닐은 로케츠에게 스윕당한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라주원은 5가지의 기본 동작을 가지고 있는데 그 동작에는 4가지의 후속 동작이 뒤따른다.'
'즉, 올라주원은 20가지의 동작을 보여준다.'(막을 도리가 없다는 뜻)
그들의 증언처럼, 올라주원은 우아한 골밑플레이로 상대팀에게 무시무시한 악몽을 선사한 센터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우승반지는 4대 센터, 유잉-로빈슨-오닐을 차례로 격파하고 차지한 우승이기에 더더욱 빛난다고 생각합니다. 조던의 부재가 큰 몫을 차지하지 않았느냐 하는 말에는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올라주원은 리그의 어떤 선수도 밟아보기 힘든 영역에 오른 몇 안되는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포지션을 따지지 않고 말이죠.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스포츠는 꿈을 이루어주는 매개체가 된다는것이 그 큰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NFL경기 후반의 박빙의 승부, 마지막 순간에 50야드 거리에서 필드골을 차는 선수를 팬들은 비웃지 않습니다. 이미 71야드 필드골이 성공한적이 있기 때문이죠. 야구에서 외야수의 키를 넘기는 장타를 끝까지 전력질주로 쫒아가는 수비수, 물론 놓칠 확률이 훨씬 높겠지만 역시 그를 아무도 비웃지 않습니다. 윌리 메이스가 이미 잡은적이 있기 때문이죠. 다시금 그런 플레이가 성공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그저 리바운드를 잡고 스크린을 걸고 골밑슛을 던지는 센터 포지션의 플레이를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은 올라주원, 물론 그 전에도 화려한 피벗이나 스핀 무브를 보여준 전설적인 센터들이 있었지만 올라주원은 그들의 플레이의 결정판인 동시에 자신의 창조적인 영감을 더한 다시보기 힘든 움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최고의 농구선수의 모습, 키가 크고 슛도 정확하면서 공중동작뿐만이 아니라 골밑에서도 현란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선수가 있다면, 바로 올라주원이 그 해답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별명이 '드림' 인것처럼 말이죠.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건너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올라주원은, 자신의 꿈 뿐만 아니라 전세계 농구팬들의 바램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이들의 성공에 대한 욕망을 동시에 충족시켜준 위대한 센터입니다. 그와 비교하기엔 아직 한참 모자라지만 휴스턴의 팬들이 야오밍의 동작에서 가끔 드림셰이크의 그 모습을 추억하는걸 보면, 그에 대한 그리움은 아직 바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스포츠에 가지는 꿈, 그것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훗날 훨씬 놀라운 플레이들이 펼쳐지는 그때를 꿈꾸는것도 팬으로써의 즐거운 상상이자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농구는 중요한 기록경기중의 하나입니다만, 가능하면 기록과 함께 경기를 보실것을 권해드립니다. 지금까지 47분동안 판에 박힌 플레이가 나왔을지 몰라도, 마지막 1분에 어떤 플레이가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상상하고, 보고, 느끼는 것. 그것이 참된 스포츠의 행복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