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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앤롤(Pick & Roll)

JJun ™ 2006. 1. 9. 16:58
농구의 대표적 승리공식 '픽앤롤'

"유타 재즈와 경기를 하면 황당할 때가 많다. 분명 무엇을 할 지는 알겠는데, 고개를 돌려보면 공은 그물을 가르고 있다. 그들은 너무 간단해보이지만 위력적이다" 시대를 풍미했던 콤비, 칼 말론과 존 스탁턴의 픽-앤-롤(Pick-N’-Roll)에 대한 샘 카셀(LA 클리퍼스)의 소감이다. 오늘날 세계 농구계의 필수아이템처럼 자리잡은 이 픽-앤-롤은 이처럼, 가장 간단해 보이지만 쉽게 막지 못하는 주무기로 통하고 있다.

▲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픽-앤-롤

픽-앤-롤이 국내에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유타 재즈 덕분이다. 델 해리스 댈러스 매버릭스 어시스턴트 코치는 "70~80년대에도 픽-앤-롤은 몇몇 팀들에 의해 애용되어 왔다. 그러나 3점슛이 도입되고, 선수들의 슛 기량이 좋아지면서 갑자기 유행처럼 됐다"며 NBA에서의 픽-앤-롤 경향에 대해 설명한다.

국내에서는 어떨까. 전 국가대표 감독이자 수퍼액션 NBA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인 최인선 씨는 "스크린을 이용한 2대2 플레이는 있었지만, 미스매치 상황을 유발할 수 있고, 그 외 다양한 옵션 플레이가 연계되어 위력을 보인 것은 프로농구가 출범한 이후부터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라 설명한다. 그는 "기아 시절에 강동희와 김영만으로 하여금 외국인 선수를 활용해 픽-앤-롤을 부분적으로 사용했고, 이상민과 조니 맥도웰(대전 현대), 김승현과 마르커스 힉스, 바비 레이저(대구 오리온스) 등의 픽-앤-롤 플레이는 대단히 위력적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픽-앤-롤은 해리스 코치가 말한 60년대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던 전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많은 팀들이 기본적인 옵션 중 하나로 활용할 정도로 유행하지는 않았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픽-앤-롤의 시작은 1910년대, 농구 규칙 중 '드리블러도 슛을 던질 수 있다'는 규정이 생기는 등, 드리블러에 대한 룰이 관대해질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볼 수 있다. (이때만 해도 '점프 슛'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선수들이 점프하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보던 시절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스포츠 팀들은 농구, 야구 할 것 없이 구색은 갖추고 있었으나, 많은 시합수와 잦은 이동에 비해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시합 중에 두 명이서 수신호나 암호로 콤비 플레이를 펼쳤다고 하는데, 백도어(back door), 기브-앤-고(give-and-go), 픽-앤-롤 등이 바로 이런 시간을 극복하고자 행해졌던 기본 전술 플레이에서 파생되었다. 미 저널리스트 데릭 젠틸 씨는 이에 대해 "때문에 농구 원로들은 아직도 픽-앤-롤이라는 용어 대신 ‘버디 시스템(buddy system)’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기술한 바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프로농구의 선구자격인 바니 세드란-맥스 프리드먼인데, '천국의 쌍둥이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이들 콤비는 1910년대에 이러한 콤비 플레이로 뉴욕 농구계를 이끌었다. 특히, 5피트4인치(162cm)의 키로 美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역대 최단신 선수였던 세드란은 백보드가 없던 시절에도 30득점을 올렸을 정도로 탁월한 슛 감각을 자랑했기에 '천국의 쌍둥이들'이 보여준 콤비 플레이는 그만큼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170cm이 조금 안 됐던 프리드먼은 패스에 능한 선수로 역사에 남아있다. 프랑스에 농구의 묘미를 전파한 그는 세드란의 득점력을 살리며 십 수 차례 승리를 낚았고, 두 선수는 콤비 플레이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이들과 함께 뛴 바 있는 나트 홀먼은 훗날 1950년대 대한민국에 선진농구를 전파한 역대 두 번째 외국인 코치였고, 감독으로서 30~40년대에 콤비 플레이를 발전시켜갔다.

▲ 챔피언을 만든 픽-앤-롤

선수들의 장신화와 드리블, 슛 기술의 발전은 콤비 플레이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NBA 역사상 최고의 가드로 평가되는 밥 쿠지와 여전히 70대 기자들 사이에서는 '역대 최고의 NBA 선수'로 꼽히는 센터, 빌 러셀 콤비도 픽-앤-롤의 형태를 띈 콤비 플레이로 보스턴 셀틱스를 왕조로 이끌었고, 'BIG O' 오스카 로버트슨, '피스톨' 피트 매러비치 역시 빅 맨과 함께 펼쳤던 픽-앤-롤이 일품이었던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특히 두 차례 NBA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린 매러비치는 넓은 시야와 재기 넘치는 패스, 드리블 뿐 아니라 가장 위협적인 득점력을 갖춘 선수로 인정 받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뉴올리온스 재즈에서 레오나르드 로빈슨과 함께 최고의 콤비 플레이를 펼쳤다.

그 외에도 릭 베리, 래리 버드 등 시야와 득점력, 볼 핸들링, 패스를 두루 갖춘 재주꾼들이 70~80년대를 거치면서 장신들과의 콤비 플레이를 발전시켜갔다. 특히 셀틱스에서 버드가 보여준 케빈 맥헤일, 로버트 패리쉬와의 스크린
플레이는 여전히 하일라이트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장면으로 남아있다. 당시 패리쉬는 버드가 "내 인생 최고의 스크리너"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는데, 셀틱스의 경우는 70년대 말부터 도입된 3점슛 제도 덕분에 콤비 플레이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배드보이스'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도 마찬가지. 대부분이 '80년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하면 거친 수비만 기억하지만, 디트로이트는 우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공격력을 지닌 팀이었다. 명장 척 데일리와 포인트가드 아이재아 토마스(현 뉴욕 닉스 단장)가 진두지휘 하던 그들은 픽-앤-롤 뿐 아니라 팝-아웃(pop-out), 백도어나 스태거드 플레이 등 여러 옵션 플레이를 가미해 명성을 떨쳤다. 특히 빌 레임비어의 경우 외곽슛 능력도 갖추고 있었고 힘과 요령이 좋았던 센터였기에 스크린이 이뤄지는 시점에서의 수비는 늘 고민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칼 말론과 존 스탁턴, 제리 슬로언 감독의 픽-앤-롤 만큼 많은 프로농구 감독에게 '픽-앤-롤'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것은 없었다. 1985년에 처음 만나 스탁턴이 은퇴하던 2002-03시즌까지, 이들은 어느 위치에서든 완벽한 픽-앤-롤 플레이를 펼치며 상대를 제압했고, 데이비드 베노아, 크리스 모리스, 제프 호너섹, 제프 말론, 샌든 앤더슨 등의 노련한 조력자들의 존재는 재즈의 픽-앤-롤로 하여금 더 다양한 공격을 파생시킬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했다. 최인선 전 감독은 "유타의 픽-앤-롤은 국내 뿐 아니라 여러 나라 농구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라 말하는 한편 "지금은 두 선수가 은퇴하면서 색깔이 많이 바뀌었지만, 기본을 중요시하는 슬로언 감독의 철학은 변함이 없고, 그것을 이어가는 그 고집과 끈기 역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라 덧붙였다.

이처럼 외곽슛의 도입, 운동능력과 같은 선수 개인 기량의 발전, 새로운 동작들의 등장은 픽-앤-롤을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다양한 공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작전의 경지에 올려 놓았고, 이는 아마추어와 프로 할 것 없이 많은 팀들의 성공이 바탕이 되었다.

▲ 새로운 경향들

오늘날 많은 팀들이 픽-앤-롤을 사용하고 있다. 새크라멘토 킹스는 마이크 비비-크리스 웨버-블라디 디박이라는 패스 능력을 갖춘 삼각 편대가 하이-포스트에서 최고의 궁합을 보였고, 지금은 브래드 밀러가 이어 받고 있다. 스티브 내쉬와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는 각각 극강의 볼 핸들링과 마무리 능력을 바탕으로 피닉스 선즈를 2004-05시즌 서부 컨퍼런스 정규리그 1위에 올려 놓았다. 토니 파커(샌안토니오 스퍼스)가 이끄는 픽-앤-롤 역시 위력적이다. 지난 시즌, 피닉스 코칭 스태프는 스퍼스의 픽-앤-롤만 놓고 3일간 연구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서부 결승에서 무너지긴 했지만 말이다)

여기에 최근 10여년 사이에 슈팅 능력을 갖춘 빅 맨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스크린을 한 후 안으로 들어가는 픽-앤-롤 보다는, 스크린을 해주고 밖으로 빠져서 외곽을 던지는 픽-앤-팝이 새로운 대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올 시즌, 디트로이트가 라쉬드 월라스를, 토론토 랩터스가 크리스 보쉬를, 댈러스 매버릭스가 덕 노비츠키를 활용하는 것을 보면 그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KBL에서도 대구 오리온스가 바비 레이저-김승현 콤비를 활용해 쏠쏠한 재미를 본 바 있다.

픽-앤-롤과 픽-앤-팝에 대한 수비도 지속적으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존-디펜스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픽-앤-롤은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역시 NBA의 '수비 3초룰'은 정상적인 존-디펜스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있지만, 최근의 젊은 선수들이 픽-앤-롤 뿐 아니라 2대2 플레이를 수비하는 데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도 한 몫하고 있다.운동능력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따라 올라가서 쳐내거나, 뺏을 생각은 해도, 볼을 가진 선수나, 이를 돕는 선수를 미리 견제하는 수비에 있어서는 미숙한 것이다.

현재 포틀랜드 유진에서 밥 힐 코치(전 샌안토니오 감독)과 함께 유소년들을 대상으로 농구를 지도하고 있는 밥 피어스(전 일본리그 코치) 씨는 "이제는 픽-앤-스크린 플레이를 가장 잘 하고 가장 잘 막는 팀이 강팀"이라 말한다. 형식상으로는 2대2에서 시작되지만, 모든 공격과 수비는 볼이 없는 위크-사이드에서도 부지런히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5년 NBA 파이널에 나란히 오른 샌안토니오와 디트로이트는 공격과 수비에 있어 상대 2대2 플레이를 가장 잘 막는 팀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을 살펴보면,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잘 하는 팀이 승리에 그만큼 가까이 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