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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혼의 화신' 아이재이아 토마스

JJun ™ 2007. 1. 26. 09:11
 

 

1988년 6월 19일, NBA 파이널 6차전이 펼쳐지고 있던 LA레이커스의 홈 구장인 그레이트 웨스턴 포럼. 홈 팀 레이커스의 감독 팻 라일리는 초조한 표정으로 코트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라일리는 지난 시즌 사상 최강의 전력으로 우승한 직후 ‘내년에도 우승할 것이다’라고 선언했지만, 파이널에서 맞붙은 상대는 상상 이상의 기세로 전통의 명문 레이커스를 압박해 들어왔습니다. 배드보이즈로 불리며 레이커스의 라이벌 보스턴을 동부 컨퍼런스 결승에서 침몰시킨 신흥 강호 디트로이트는 레이커스가 자랑하는 쇼타임 속공에 대항해 견고한 수비와 짜임새 있는 공격으로 맞섰고, 3-2로 시리즈를 리드하고 있던 디트로이트는 그 날도 4쿼터까지 레이커스를 리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디트로이트에는 명장 척 데일리를 비롯하여 ‘살인자’ 빌 레임비어, 베테랑 포워드 애드리안 댄틀리, 냉정한 저격수이자 5차전의 영웅인 조 듀마스 등 알찬 선수들이 많았지만, 포럼 관중들의 시선은 배드보이즈를 진두지휘하는 181cm의 조그만 포인트가드에게 쏠리고 있었습니다.

그 선수는 전반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스피드로 코트를 누비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돌아가 버린 발목에 테이프를 감고 돌아온 3쿼터에 25점을 올려 파이널 한 쿼터 최다득점 기록을 세운 그 선수는, 매직 존슨과 바이런 스캇이 버티던 레이커스 백코트를 완전히 붕괴시키며 우승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발목의 통증은 그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발목 따위는 우승을 위해 악마에게 던져주기라도 했다는 듯이.... 포럼의 관중들은 그가 질풍같은 드리블 후 뛰어올라 점퍼와 레이업을 성공시킬 때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역시 레이커스였습니다. 이미 우승 트로피가 디트로이트의 라커룸으로 옮겨지고 있던 종료 1분 전, 바이런 스캇이 점퍼를 성공시켜 1점 차로 따라붙은 레이커스는 14초를 남기고 카림 압둘 자바의 스카이 훅샷으로 경기를 역전시켰습니다. 디트로이트의 마지막 공격에서 듀마스의 슛이 빗나가면서, 레이커스는 천신만고 끝에 6차전을 승리하며 기사회생했습니다.
6차전에서 모두 43점을 기록한 배드보이즈의 포인트가드는 듀마스의 마지막 슛이 림을 빗나가자 그대로 코트에 쓰러져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는 정말로 이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옥에서 기어올라와야 했던 모든 시간을 걸고, 리그 최고의 명문 팀을 이겨보이고 싶었던 거죠.

결국 7차전에서 드래프트 동기인 제임스 워디에게 트리플더블을 허용하며 우승 일보직전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다리를 절룩이며 경기장을 빠져나가던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도전을 향한 결의가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삶의 모든 순간을 싸워 이겨야 했던 사나이, 아이재이아 토마스의 이야기입니다.

 

지옥을 보며 크다

Isiah Lord Thomas 3세는 1961년 4월 30일 시카고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토마스의 집은 시카고 서부의 우범 지역에 있었는데, 토마스가 3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집을 나가버리는 바람에 어머니가 구걸을 하며 9남매를 홀로 키워야 했죠. 벌이가 신통치 않은 날은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겨울이 되면 난방도 들어오지 않는 ‘집 비슷한 것’에서 열 명이 오들오들 떨며 지내야 했습니다. 각자 쓰는 침대 따위는 사치스러운 소리에 불과했고, 아이재이아의 큰형들은 바닥에서 자야 했죠.

어머니는 9남매를 위해 최선을 다 했지만,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 아이들은 점점 어두운 길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남매 중 대부분이 마약에 손을 댔고 범죄를 저질렀죠. 결국 아이재이아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이미 9남매 중 3명이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비탄에 빠진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막내 아이재이아만은 지켜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불법 개조한 샷건을 불법으로 구한 어머니는 잘 때도 그 샷건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 죽은 아이들이 몸담았던 갱들이 집까지 찾아오자 어머니는 그들에게 샷건을 들이대며 소리쳤습니다.

“너희들 지금 거들먹거리는데, 여기서 거들먹거리며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고 그게 바로 나야. 당장 우리 집 현관에서 꺼져. 안 그러면 다 날려버릴 테니까!”

어머니는 아이재이아를 범죄와 완전히 격리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루 일과를 모조리 체크했고, 방과 후 활동은 농구만을 허락했죠. 어느 날 아이재이아가 농구에 빠져서 늦게 돌아오자, 어머니는 아이재이아를 여름 내내 집에 가둬놨습니다. 그 날 농구를 같이 했던 마크 어과이어는 나중에 아이재이아와 함께 NBA 챔피언의 감격을 나누게 됩니다.

아이재이아가 고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어머니는 아이재이아를 안전하고 대학 진학이 가능한 곳에서 운동시키기 위해 또 한 번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그 무렵 아이재이아네 동네에는 정기적으로 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인근 고등학교에서 농구 코치를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거죠.

어머니는 아이재이아를 데리고 가서 그 코치에게 눈물로 사정했습니다. 그 학교는 백인들이 주로 가는 학교였고 학업 성적도 뛰어나야 운동을 할 수 있는 일종의 ‘명문교’였지만, 코치는 고심 끝에 아이재이아가 입학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아이재이아는 시카고의 명문 고등학교인 St. Joseph High School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변두리에 위치한 아이재이아의 집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전철과 버스로 2시간 이상 걸렸지만, 자신에게 걸린 어머니의 기대를 잘 알고 있던 아이재이아는 성실하게 학교에 다녔습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 따위는 없었고, 아이재이아는 자신이 쥐고 있는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죽어버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상대로 백인 학생들의 텃세가 시작되었고 농구선수 치고는 작은 키였던 아이재이아에게 무자비한 린치가 가해졌지만, 어려서 지옥을 보며 자란 아이재이아에게 그 정도 폭력은 애들 장난 수준이었습니다. 아이재이아는 자기를 때리는 동료 학생에게 훗날 ‘작은 악마의 미소’라 불리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날카로운 패스를 해주곤 했죠. 동료들은 그 웃음이 얼마나 처절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린치를 해도 효과가 없자, 이제 동료들이 아이재이아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싸움을 해도 백 대를 때리는 사람보다 백 대를 맞고 일어나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죠. 어느 새 모두가 아이재이아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는 팀의 리더로 성장했습니다. 학업에도 신경을 써 장학생이 된 아이재이아는 마지막 해에 평균 24득점 6리바운드 7어시스트와 5개의 스틸을 기록하며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스카우트의 계절이 돌아오자 NCAA의 많은 대학 팀들이 아이재이아에게 입학 권유를 했고, 아이재이아는 그중 명문 인디애나 대학교를 선택했습니다. 전공은 ‘범죄 심리학’이었죠.

당시 인디애나 대학교는 다혈질로 유명한 바비 나이트 감독이 이끌고 있었죠. 하지만 열정적으로 경기에 임하지 않는 선수에게는 가차 없는 욕설을 퍼붓던 나이트 감독도, ‘열정적’을 넘어 ‘필사적’으로 경기에 임하는 아이재이아에게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고향의 ‘집 비슷한 곳’에서 라디오로 아들의 경기 중계를 듣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이재이아는 절대 질 수가 없었던 것이죠. 결국 아이재이아는 2학년이던 1981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를 누르고 NCAA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이제 아이재이아의 눈은 NBA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투쟁, 투쟁, 투쟁

1981년 NBA 드래프트, 아이재이아 토마스는 전체 2순위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입단했습니다. 1순위는 아이재이아의 죽마고우인 마크 어과이어였으며, 롤랜도 블랙맨, 톰 체임버스, 래리 낸스, 대니 에인지 등 이후 NBA를 이끌어간 선수들이 리그에 첫 발을 내디뎠죠.

하지만 토마스는 디트로이트에서 뛰기를 거부했습니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고작 21승 밖에 올리지 못하던 리그 최약체 팀이었고, 토마스는 이기지 못하는 팀에서는 뛸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죠. 물론 정말로 입단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지만, 토마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승리를 향한 의지를 구단도 가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급해진 맥클로우스키 단장은 토마스가 적극적인 선수 영입을 약속했고, 토마스는 인사이드를 제압하고 리바운드를 잡아줄 수 있는 블루워커 센터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대대적인 팀 개편을 단행한 매클로우스키 단장은, 클리블랜드에서 제 자리를 잡지 못하던 ‘낙제생’ 빌 레임비어를 데려오고 그 해 지명한 포워드 켈리 트리푸카와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것으로 ‘배드보이즈’ 1기의 라인업이 완성되었죠.

루키 시즌을 맞은 토마스는 언제나와 같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전년도 60승 팀인 밀워키를 상대로 한 홈경기를 승리로 이끈 토마스는 공격의 양 날개였던 트리푸카와 존 롱을 이끌며 맹활약했죠. 전 시즌까지 팀 득정을 외로이 책임지던 존 롱은 평균 득점이 4점이나 올랐고, 루키 트리푸카 역시 20득점을 넘기는 활약을 보였습니다. 레임비어는 이제야 자리를 찾았다는 듯 시즌 더블-더블을 기록하며 든든히 뒤를 받쳤죠. 토마스는 루키 시즌 평균 17득점과 7.8어시스트, 2.1스틸로 올스타전에 선발로 뛰었으며, 트리푸카와 함께 올루키 퍼스트팀에 선발되었습니다. 비록 팀은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지만, 토마스는 디트로이트를 전년 대비 18승이나 끌어올리며 팀의 새로운 리더로 떠올랐습니다.

이듬해에는 전 시즌 중반 합류한 비니 존슨이 본격적으로 팀에 적응하면서 기대를 모았지만, 오히려 팀은 37승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토마스는 팀 내 득점 2위, 어시스트와 출장 시간 1위를 기록했지만 아직 자신의 에너지를 팀 전체에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했죠. 토마스는 매 경기 온 몸을 던져 팀 승리를 위해 노력했지만, 필라델피아나 보스턴 같이 노련한 팀들은 결코 토마스에게 승리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고민에 빠져있던 토마스에게 길이 보인 것은 그 해 여름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만나다.

1983년 여름, 디트로이트는 척 데일리 감독의 영입을

 

발표했습니다. 신임 감독 데일리는 전 시즌 클리블랜드에서 임시 감독을 맡은 것이 NBA 감독 경력의 전부였지만, 선수 하나하나를 이해하고 동기를 부여해주는 데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데일리는 토마스를 중심으로 팀을 꾸려나가겠다고 공언했고, 선수들에게 ‘토마스 정신’을 주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시즌이 시작되자, 디트로이트는 전 시즌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투쟁심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레임비어는 ‘살인자’라는 소릴 들을 정도의 육탄 수비로 골밑을 완전 장악했고, 식스맨으로 보직을 바꾼 비니 존슨은 순식간에 폭발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전자레인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열정적인 플레이를 선보였습니다. 그들의 전투적인 플레이에 리그는 경악했고, 디트로이트는 ‘배드보이즈’라는 별명을 얻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토마스는 평균 21.3득점과 11.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20-10 클럽에 가입했고, 2.5개의 스틸로 리그 2위에 올랐습니다. 올스타전에 3회 연속으로 출전해서 21득점 15어시스트로 MVP에 선정되기도 했죠. 하지만 토마스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은 박빙의 승부에서 양팀 모두 극심한 정신적 피로를 보이는 경기 막판이었습니다. 다른 선수들이 지쳐갈 수록 토마스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고, 그 차이는 토마스의 수많은 클러치 플레이로 나타났죠.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사투를 펼쳐야 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토마스에게 침착함과 끈기, 그리고 무엇보다 매 순간 사력을 다하는 투지를 심어줬습니다.

그 해 처음으로 All NBA 퍼스트팀에 선정된 토마스는 팀을 49승으로 이끌며 첫 5할 승률과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룩했습니다. 1라운드 상대는 뉴욕. 비록 ‘조던 이전의 득점왕’ 버나드 킹과의 클러치샷 대결전 끝에 탈락하고 말았지만, 토마스는 동부 컨퍼런스를 대표하는 포인트가드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토마스는 시즌 평균 13.9어시스트로 리그 역사상 한 시즌 평균 최다 어시스트 기록을 세우며 팀을 다시 한 번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습니다.



타도 대상 1호: 래리 버드

1라운드에서 뉴저지를 세 경기만에 일축한 배드보이즈는 2라운드에서 래리 버드가 이끄는 디펜딩 챔피언 보스턴 셀틱스와 맞붙게 되었습니다. 당시 보스턴은 2년 연속 시즌 MVP 버드를 비롯하여 훗날 명예의 전당 입성자 4명이 뛰고 있던 초 엘리트 팀이었고, 매직 존슨이 이끄는 LA 레이커스 외에는 당할 자가 없다고 평가되던 동부 컨퍼런스의 왕자였습니다. 시즌 성적이 17승이나 뒤졌던 배드보이즈로써는 해보나마나한 상대였죠. 자칫 해보기도 전에 무너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리더 토마스는 선수들의 전의를 불태우기 위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썼습니다. 바로 막다른 골목으로 자신과 팀을 몰아가는 것이었죠.
토마스는 기자들에게 ‘버드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가 백인이기 때문’이라며 싸움을 걸었고 ‘셀틱 프라이드고 뭐고 박살을 내 버리겠다’며 떠들고 다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인들은 인종에 관한 발언에 대해 상당히 민감합니다. 토마스는 가뜩이나 호의적이지 않던 언론의 집중 공격으로 궁지에 몰렸지만, 그것이야말로 토마스가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배드보이즈는 ‘세상에 우리 편은 없다’는 것을 절감했고, 그렇게 된 바에는 악역을 훌륭히 소화해 주기로 결의를 다졌던 것이죠.

보스턴에서 열린 첫 두 경기를 내준 배드보이즈는 홈에서 열린 3, 4차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2연승하며 시리즈를 동률로 끌고 갔습니다. 하지만 보스턴의 막강한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5, 6차전을 내주면서 탈락하고 말았죠. 하지만 이 시리즈를 통해 배드보이즈는 전국적인 관심을 한 몸에 모으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조 듀마스와 릭 마혼이 가세한 디트로이트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애틀랜타에게 탈락하며 잠시 숨고르기를 했고, 토마스는 올스타전 두 번째 MVP와 3년 연속 20-10 클럽 및 All NBA 퍼스트팀에 선정되었습니다.

이듬해, 배드보이즈는 베테랑 스코어러 애드리언 댄틀리와 루키 포워드 데니스 로드맨을 영입하여 배드보이즈 2기 라인업을 완성했습니다. 처음으로 시즌 50승 고지에 오른 토마스와 배드보이즈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다시 한 번 보스턴과 맞붙었습니다. 격렬한 몸싸움이 난무하는 가운데 5차전까지 홈게임을 승리하여 디트로이트가 3승 2패로 리드하고 있었습니다.

보스턴 가든에서 열린 6차전, 디트로이트는 6차전에서 시리즈를 끝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보스턴 같은 레전드 팀과 7차전을 해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죠. 게임 종료 5초전, 디트로이트는 한 점 앞서고 있었고 공격권마저 가지고 있어 결국 디트로이트가 파이널에 갈 것으로 보였습니다.

바로 이때, 지금도 명장면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슈퍼 플레이가 나왔습니다.

토마스는 사이드라인에서 레임비어에게 인바운드 패스를 준비하고 있었고, 보스턴의 래리 버드는 자유투라인 근처에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토마스가 패스를 하려는 순간 버드가 쏜살같이 레임비어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결국 버드는 레임비어가 볼을 잡기 전 순식간에 공을 가로챘고 동료 데니스 존슨에게 패스했습니다. 존슨은 침착하게 레이업을 성공시키고 순식간에 승부가 108-107로 뒤집혔습니다. 남은 시간은 1초, 토마스-레임비어 콤비의 통한의 실책이었죠.

결국 시리즈를 마무리 짓지 못한 디트로이트는 7차전에서 패배, 토마스의 첫 파이널 진출은 다음 시즌으로 미루어졌습니다.

 


타도 대상 2호: 마이클 조던

1987-88 시즌, 이제 배드보이즈는 동부 컨퍼런스의 최강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시즌 54승으로 올리며 센트럴 디비전 1위를 차지한 배드보이즈는 2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1라운드 상대 워싱턴을 상대로 최종전까지 가는 의외의 고전 끝에 간신히 2라운드에 진출했습니다.

2라운드 상대는 정규 시즌 및 올스타전 MVP 마이클 조던을 중심으로 동부의 새로운 강자로 성장하고 있던 시카고 불스였습니다. 토마스는 조던의 루키 시즌부터 올스타전에서 ‘왕따‘시키는 등 처음부터 둘의 사이는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레임비어 등 배드보이즈의 다른 멤버들도 리더를 따라 조던을 내동댕이치는 등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조던을 경계하곤 했습니다. 당한 것은 반드시 갚아주기로 유명했던 조던은 배드보이즈와의 경기에서 엄청난 득점력을 과시하곤 했는데, 그 해에도 정규 시즌 6번의 맞대결 중 4경기에서 35점 이상을 기록했고 시즌 마지막 대결에서는 무려 59점을 퍼부으며 배드보이즈를 녹다운 시킨 바 있었죠. 조던과 시카고는 항상 도전자의 입장이던 배드보이즈가 처음으로 맞이한 ‘도전자’였습니다.
척 데일리 감독과 토마스는 장시간의 회의 끝에 조던을 상대로 한 극단적인 수비 전술을 고안했습니다. 이른바 ‘조던 룰’이죠. 조던은 처음 경험해보는 엄청난 압박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조던을 봉쇄한 배드보이즈는 시리즈 전적 4-1로 비교적 손쉽게 승리했습니다. 그것이 앞으로 계속될 긴 악연의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죠.

컨퍼런스 파이널 상대는 세 번째 만난 보스턴이었습니다. 두 팀은 공수의 밸런스와 경기 운영 능력, 리더의 지배력 등에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죠. 하지만 배드보이즈의 기세가 보스턴을 압도했습니다. 두 팀은 매 경기 10점차 이내의 접전을 펼친 끝에 결국 배드보이즈가 세 번째 도전 만에 보스턴을 무너뜨리며 승리를 거뒀죠.

밑바닥에서 농구를 시작한 지 20여 년, 토마스는 드디어 정상에 오를 기회를 잡았습니다.

 


타도 대상 3호: 매직 존슨

디트로이트로 프랜차이즈를 옮긴 뒤 처음으로 파이널에 오른 배드보이즈가 맞이한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LA 레이커스였습니다. 배드보이즈는 최고의 팀을 맞아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초 엘리트 팀이었던 레이커스를 뛰어넘기에는 마지막 한 걸음이 부족했습니다. 시리즈 중반 까지 3-2로 리드하던 배드보이즈는, 6차전에서 토마스의 부상 투혼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패한 뒤 7차전마저 내줘 우승 일보직전에서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인 1988~89 시즌, 배드보이즈는 마침내 모든 가능성을 활짝 피웠습니다.

토마스와 듀마스, 그리고 비니 존슨은 척 데일리의 ‘3가드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현했습니다. 각각의 포지션에서 단신에 속했던 이 세 명은 압도적인 스피드와 볼 핸들링, 패싱력으로 나머지 두 명의 포스트맨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24초를 효율적으로 활용했고, 이는 상대 수비진에게 극심한 혼란을 야기시켰습니다. 이들은 확연히 다른 성격으로도 유명했는데, ‘전자레인지’라는 별명을 가진 다혈질의 비니 존슨이 성질을 폭발시켜 상대를 움찔하게 만든 뒤 ‘나홀로 신사’ 듀마스가 안심시키고, ‘구밀복검의 대가’ 토마스가 ‘웃으면서’ 치명타를 먹여 상대의 혼을 쏙 빼놓곤 했죠. 결국 세 명의 가드는 시즌 평균 50점을 합작하며 배드보이즈의 공격을 이끌었고, ‘3가드 시스템’은 배드보이즈의 주력 공격 전술로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배드보이즈를 배드보이즈이게 하는 것은 공격이 아니라 수비였습니다. 배드보이즈는 적극적인 몸싸움으로 상대가 공격을 세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만들었으며, 그 해 디펜시브 퍼스트팀 멤버인 듀마스와 로드맨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압박으로 제 플레이를 할 수 없도록 만들었죠. 배드보이즈를 상대로 공격하는 팀들은 항상 샷클락에 쫓겨 무리한 슛을 쏘아야 했고, 그렇게 림을 돌아나온 볼은 그 해 리그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수비리바운드를 잡은 레임비어나 릭 마혼, 존 샐리, 그리고 데니스 로드맨 등 박스아웃에 뛰어난 배드보이즈 인사이더들에게로 향하곤 했습니다. 만약 압박을 이겨내고 완벽한 돌파를 해냈다고 하더라도, 그 선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리그 역사상 가장 난폭한 빅맨들의 거친 파울들뿐이었죠. 그들은 그야말로 '죽을 각오'가 아니라 '죽일 각오'로 상대를 내동댕이쳤습니다. 결국 배드보이즈는 기술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상대를 완벽하게 압도하며 유리한 입장에서 수비를 펼쳤습니다.

배드보이즈의 이러한 공격 및 수비 전술은 4쿼터 종반으로 갈수록 상대를 심하게 지치도록 만들었고, 리그 최고의 강심장 토마스를 소유한 배드보이즈는 마지막에 모든 상황을 통제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죠. 그 해 배드보이즈는 득점 마진 6.3을 기록하며 시즌 63승을 거뒀는데, 다른 시기의 60승 팀에 비해 다로 낮은 득점 마진을 가지고도 그 정도 성적을 올렸다는 것은 배드보이즈의 접전시 경쟁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모두 토마스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8연승으로 시즌을 시작한 배드보이즈는 승승장구하며 상승세를 이어갔습니다. 특히 지난 시즌 파이널에서 아쉬운 패배를 안겼던 레이커스와 센트럴 디비전의 새로운 라이벌 시카고와의 경기를 전승하며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죠.
2월 중순, 토마스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디트로이트 프론트가 댈러스와 트레이드를 단행, 노쇠한 애드리언 댄틀리를 보내고 어려웠던 시절의 죽마고우이자 드래프트 동기인 마크 어과이어를 데려왔기 때문이죠. 어과이어는 토마스의 경기 철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선수였고, 둘은 3월 한 달 동안 팀을 16승 1패로 이끌며 왕좌에 오를 준비를 마쳤음을 팬들에게 알렸습니다.

플레이오프에 1번시드로 당당하게 진출한 배드보이즈는 1라운드에서 버드가 빠진 보스턴을 3-0으로 일축했고 2라운드 상대인 밀워키에게도 완승을 거둔 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시카고 불스와 다시 만났습니다.
시카고는 조던을 포인트가드로 기용하며 조던룰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배드보이즈는 이번에는 조던이 아니라 조던 외의 다른 선수를 묶는 방법으로 시카고의 허를 찔렀습니다. 결국 배드보이즈는 피펜을 비롯한 다른 선수들을 철저하게 봉쇄하며 시리즈를 4-2 승리로 이끌었고, 파이널에서 다시 한 번 레이커스와 자웅을 겨루게 되었습니다.

 


배드보이즈의 시대

레이커스는 포스트시즌을 전승으로 올라온 여전한 강팀이었습니다. 라일리 레이커스 감독이 한 ‘쓰리-피트’란 말은 이미 관련 상품까지 나올 정도로 유명한 말이 됐고, 모든 사람들이 그 해 은퇴 선언을 한 카림 압둘-자바와 시즌 MVP 매직 존슨이 3연패를 할 것인지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배드보이즈는 정규 시즌 최고승률 팀이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레이커스의 우승을 점쳤습니다.

하지만 레이커스에는 이미 시리즈 시작 전부터 악재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주전 가드 바이런 스캇이 햄스트링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것이죠. 레이커스에서 가장 빠른 선수였던 스캇의 이탈은 배드보이즈 3가드의 플레이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었습니다. 결국 배드보이즈는 1차전 홈경기에서 3가드가 65점을 합작, 109-97의 여유있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2차전에서도 배드보이즈의 행운은 이어졌습니다. 경기 중 매직이 햄스트링 부상으로 벤치에 앉은 것이죠. 나머지 선수들이 분전했지만, 배드보이즈는 접전에 강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108-105의 짜릿한 승리로 2연승을 거뒀습니다.

LA로 장소를 옮겨 벌어진 3차전, 매직을 잃은 레이커스 선수들의 투혼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3연패’를 위해서는 ‘3연패’를 당할 수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 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온 배드보이즈의 투혼은 레이커스를 능가했습니다. 듀마스는 3쿼터에만 17점을 연속으로 꽂아넣으며 레이커스의 기세를 꺾었고, 4쿼터에는 비니 존슨이 13득점으로 배턴을 이어받았죠. 그리고 경기 막판에는 언제나처럼 토마스가 6득점과 3개의 어시스트로 게임을 지배했습니다. 결국 배드보이즈는 듀마스가 천금같은 블록샷을 성공시키며 114-110의 승리를 거뒀고 이제 우승까지 한 게임만을 남겨놓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시작된 운명의 4차전. 작년 같은 장소에서 우승을 눈앞에 두고도 아쉽게 물러나야 했던 배드보이즈 선수들의 각오는 남달랐습니다. 테크니컬 파울이 난무하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 전반을 다섯 점 차로 뒤졌지만, 배드보이즈는 결코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4쿼터에서 전세를 역전시킨 배드보이즈는 카림의 마지막 투혼을 앞세운 레이커스의 추격을 뿌리치고 105-97의 승리를 거뒀습니다. 배드보이즈가 디트로이트로 프랜차이즈를 옮긴 이후 처음 맞는 감격의 순간이었죠. 숱한 고생 끝에 마침내 왕좌에 올라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던 토마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포럼의 레이커스 팬들은 승자에 대한 박수 대신 이날 은퇴 경기를 치른 카림을 향해 환호를 보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그때까지 그들이 흘려야 했던 땀과 눈물의 보상은 다름아닌 그들 자신의 몫이었으니까요. 그들은 챔피언이 된 것입니다!

이듬해, 배드보이즈는 다소 달라진 라인업으로 디펜딩 시즌을 맞이했습니다. 마혼이 뉴저지로 떠나고 시즌 중반 어과이어가 식스맨으로 보직을 바꾼 후, 제임스 에드워즈와 데니스 로드맨이 선발 기용된 것이죠. 에드워즈를 이용한 포스트업 공격을 신무기로 내세운 라인업이었지만, 최고의 전력으로 우승한 팀에 메스를 들이댄 것은 언론의 의구심을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토마스를 중심으로 한 배드보이즈는 공/수 모든 면에서 여전히 배드보이즈였고, 시즌 59승을 거두며 다시 한 번 1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습니다.

1, 2라운드에서 인디애나와 뉴욕을 상대로 손쉽게 승리를 거둔 배드보이즈는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도입한 시카고와 세 번째로 격돌했습니다. 안정적인 플로어 밸런스를 추구하는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더 이상 조던 룰을 허용하지 않았고, 배드보이즈는 시카고의 거센 추격을 받으며 최종전까지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7차전을 앞두고 시카고의 피펜이 극심한 두통을 일으켰고, 배드보이즈는 ‘조율사’를 잃은 시카고의 공격을 단 74점으로 묶으며 조던에게 다시 한 번 좌절을 안겼죠.

파이널 상대는 레이커스가 아닌 포틀랜드였습니다. 그 해 리그 최다승인 63승을 올린 레이커스가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피닉스에게 져 탈락하고 만 것이죠. 우승을 하고도 ‘매직의 부상 덕분’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던 배드보이즈는 적잖이 실망했지만, 결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당시 포틀랜드는 ‘서부의 조던’이라 불리던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이끌고 있었습니다. 동부에서 항상 조던을 상대해야 했던 배드보이즈에게는 익숙한 스타일의 팀이었죠. 배드보이즈는 언제나처럼 거친 플레이로 포틀랜드를 밀어붙였고, 마침내 5경기만에 시리즈를 끝내며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시리즈 평균 27.6득점 8어시스트 5.2리바운드와 무려 69%의 3점 성공률을 기록한 토마스에게는 생애 첫 파이널 MVP가 주어졌죠. 토마스는 환하게 웃으면서 외쳤습니다.
“우리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스코어가 어떻든 항상 우리가 이길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이기려는) 의지의 전투이다. 항상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얼마나 진실히 그것을 원하는지우리 플레이 스타일을 가지고 입방아를 찧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패배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승자다!”

배드보이즈가 거칠다고 말하는 ‘입방아’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지옥을 헤쳐나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죠.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정신이 극복할 수 없는 수준까지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투혼이 인간의 모습을 한 선수’

1990~91 시즌, 토마스는 부상으로 시즌 48경기만을 출장했고, 구심점을 잃은 팀은 신흥 강호 시카고에게 디비전 타이틀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 애틀랜타와 보스턴을 상대로 어찌어찌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토마스는 발과 햄스트링, 손목 부상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맞붙은 시카고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던 토마스와 배드보이즈를 가볍게 제압하며 오랜 시련 끝에 첫 우승을 일궈내게 되죠. 배드보이즈 시대의 종언이었습니다. 배드보이즈의 성적은 해를 거듭할수록 떨어졌고, 척 데일리가 팀을 떠난 이듬해에는 플레이오프에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1993~94 시즌, 무릎 부상, 갈비뼈 골절, 발바닥 부상, 허벅지 부상 등으로 신음하던 토마스는 94년 4월 19일 올랜도와의 홈경기에서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했고, 다음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 해 여름 세계선수권 대회에 출전하기로 되어있었지만 그것도 불가능해지고 말았습니다. 대학 시절 모스크바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미국의 보이콧으로 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토마스의 아쉬움은 더 컸죠.

토마스는 13시즌 동안 979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19.2득점과 9.3어시스트, 1.9스틸을 기록했습니다. 통산 출장 경기와 득점, 어시스트, 스틸은 모두 디트로이트 프랜차이즈 기록으로 남아있죠. 영구 결번과 명예의 전당, ‘NBA 위대한 50인’ 선정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토마스는 최악의 환경에서 자라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낸 선수입니다. 그의 팀은 거친 플레이로 수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버드를 극복해내고, 조던을 좌절시키고, 매직을 넘어섰죠. 토마스는 매직을 이기고 80년대 최후의 승자가 되었으며, 조던은 토마스를 극복하고 나서야 90년대의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비를 중시한 그의 농구는 80년대의 공격농구에서 90년대의 수비농구로 넘어가는 리그의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토마스가 한 모든 일들은 그만이 가지고 있던 ‘투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어린 토마스는 자기 주변의 지옥을 보며 ‘노력과 승리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선수생활 내내 실현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해병대에는 ‘싸워서 이기고 지면은 죽어라’라는 말이 있지만, 토마스가 이 말을 듣는다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릅니다.

토마스는 은퇴 후 여러 팀의 감독과 단장을 역임하는 동안에도, 자신과 같은 환경에서 자라는 불우한 이웃에 대한 따뜻한 손길을 잊지 않았습니다. 대학을 중퇴하며 중단해야 했던 ‘범죄심리학’ 공부를 마치고 어머니의 날에 학위를 선물한 토마스는 아동 교육, 범죄 예방, 빈곤 퇴치 등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고, 75명 이상의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했습니다.

비교적 일찍 끝난 선수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리그를 지배했던 그의 숨막히는 투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가 감독을 맡고 있는 뉴욕 닉스의 성적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지만, 뉴욕의 선수들이 토마스의 ‘전투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다면 언젠가는 리그를 호령할 날이 올 지도

모릅니다.

그 날을 위해서, 토마스는 오늘도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작성자 : heltant79
출처 :
http://news.naver.com/nboard/read.php?board_id=sports_dis06&page=6&nid=2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