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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트 채임벌린...거대함에 가려진 위대함..

JJun ™ 2006. 12. 22. 23:46

NBA 역사상 가장 부당한 평가를 받는 선수를 꼽아보라면

필자는 윌트 채임벌린을 주저 없이 꼽는다.

윌트 채임벌린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선수 중 하나임에도 그의 업적은 평가절하되고

마이클 조던은 커녕 라이벌이던 빌 러셀에게도 밀리는 선수로 기억된다.

하지만 과연 그가 그런 평가를 받을만한 선수인가...


채임벌린을 저평가하는 이유를 대표적인 두 가지만 꼽아본다면

첫 번째 채임벌린이 뛸 때에는 그의 체격조건에 필적할만한 센터가 없었다.

두 번째 우승반지가 두개 밖에 없다는 것이다.


채임벌린은 공식 신장 216cm, 공식 체중 124.7kg의 거인이었다.

전설적인 거인 골리앗의 환생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거인이었던 채임벌린은

실제 신장은 218cm라는 설과 체중 역시 전성기 때는 136kg 이상이었다는 설이 맞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NBA에 입단했던 59년 NBA에 그보다 더 큰 선수는 없었다. 7피트(213cm) 이상인 선수도 월터 듀크스 정도가 고작이었고 당대 최고의 센터였던 빌 러셀은 206cm(일부에선 208cm라고 표기하기도 함)이었고 대부분 센터들은 206cm 정도였다.


이런 어마어마한 신체조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채임벌린이 압도적인 기록을 작성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놀라운 운동능력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고등학교 때 그는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유명한 농구선수로 NBA 소속이던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의 모든 선수들을 1대1로 이겼을 정도로 대단했는데 농구 외에도 육상에서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시절 그는 200m, 400m 허들, 크로스컨트리,

높이뛰기, 삼단뛰기에서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을 정도였다. 그가 고등학교 때 작성한

육상기록을 살펴보면 440야드(약 400m) 달리기 49초0, 880야드(약800m) 달리기

1분58초3, 포환던지기 16.25m, 멀리뛰기 6m71cm였다.

이런 기록이 50년대 중반 고등학생의 기록인 것이다.


실제로 캔사스 대학재학 때 그가 빅 8 컨퍼펀스 우승을 차지했던 높이뛰기 기록은 198cm인데 기록만 보면 ‘별로 안 높네’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당시는 50년대였고 채임벌린은 배면뛰기가 아닌 가위뛰기 상체를 세우고 다리를 접어서 넘는 방식으로 198cm를 기록했으니 정말 놀라운 점프력이 아닐 수 없다.

실제 대학 시절 채임벌린은 미국 대표로 올림픽 10종 경기에 출전하라는 권유를 받았을 정도로

육상에서도 발군이었다.

또한 농구에서 은퇴 후에는 배구선수로 명성을 날렸고 구단주 겸 선수로 미국 배구 발전

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만약 채임벌린이 신체조건만으로 NBA를 지배했다고 가정한다면 현재 야오밍은 30득점에 15리바운드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또한 하승진도 아시안 게임에서 경기를 지배해야 했어야 한다. 하지만 채임벌린은 뛰어난 신체조건에 발군의 운동능력을 지닌 완벽한 운동선수였다.


채임벌린은 NBA 입단 당시부터 수많은 사건을 만들어 냈다.

그 중 하나는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의 구단주 에디 고틀립이 고등학생이던 그를 지역연고

드래프트에서 지명한 것인데 지역연고 드래프트란 그 지역에 있는 대학출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

이라 위반된 것이지만 결국 필라델피아와 상관없는 캔사스 대학으로 진학한 채임벌린은

필라델피아에 지역연고 드래프트에 의해 4년 후 입단하게 된다.


또한 채임벌린이 입단하면서 NBA는 그의 위력을 반감시키기 위해 세 가지 규정을 바꿔야

했다. 첫 번째는 자유투 때 레이업 금지였다. 자유투 라인에서 한 발짝만 움직여도 덩크슛이 가능했던 채임벌린은 자유투를 레이업으로 넣기도 했는데 NBA에서는 이를 금지시켰다.

두 번째는 베이스라인에서 인바운드패스를 할 때 백보드 넘어 패스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다. 백보드 끝을 잡을 수 있었던 채임벌린은 백보드를 넘어온 패스를 쉽게 앨리웁으로

연결 시킬 수 있었는데 결국 금지가 된 것이다.

세 번째는 동료가 던진 슛이 하향 곡선을 그릴 때 공격수가 궤도를 바꿔놓을 수 없다는

오펜시브 골텐딩 규정이었다.

채임벌린은 골대 밑에 있다가 날아오는 공을 잡아 레이업으로 연결하기 일쑤였는데

이 역시 금지가 되었다. 그래도 그가 입단해 어마어마한 득점력을 과시하자 NBA는

페인트존의 너비를 12피트(365.76cm)에서 16피트(487.68cm)로 넓혔다.


경기 중에도 그는 괴력을 과시했는데 93kg의 체중을 지닌 존 하블리첵이 팔에 매달렸는데도 덩크슛을 내리꽂았고 100kg 이상 되는 선수들을 한 팔로 번쩍번쩍 들어올리기 일쑤였다. 그가 수많은 팔꿈치를 맞고도 NBA에서 싸움을 하지 않은 이유는 상대방이 맞으면 죽을 수 있기 때문이었고 항상 선수들이 뒤엉켜 싸울 때면 한 팔로 선수들을 말릴 수 있었던 괴력의 사니이였다.


이런 운동능력을 지닌 거인은 NBA 아니 그 어느 종목을 따져 봐도 없다.

심지어 채임벌린은 1966년에는 NFL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고

권투에서는 무하마드 알리에게 도전장을 냈지만 대전료 관계로 무산이 되기도 했다.


그는 거대한 신체 때문에 위대함이 가려진 진정한 거인이었다.

 

 

 

채임벌린의 적수들


윌트 채임벌린을 떠올릴 때 그 때는 그의 적수가 될만한 센터가 없었다고 많이 생각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와 함께 동시에 뛰었던 센터 중 이름을 알만한 선수들을

꼽아보자.

우선 라이벌 빌 러셀부터 월트 벨라미, 윌리스 리드, 카림 압둘자바, 네이트 서먼드, 웨스 언셀드, 데이브 코웬스, 밥 라니어, 클라이드 러블릿, 밥 맥카두까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만해도 9명이다.

이 중 러셀, 압둘자바, 리드, 서먼드, 코웬스, 언셀드는 NBA 50주년에 뽑은

위대한 50인의 선수에 이름을 올린 전설적인 선수들이다.


이들에 대해 살펴보며 채임벌린과 비교를 해보자.


물론 비교에 앞서 채임벌린에 대한 소개를 해보자. 216cm, 125kg의 채임벌린은 1959년 지역연고 드래프트에서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에 지명을 받았다. 데뷔 시즌인 59-60 시즌 37.6득점, 27리바운드라는 믿어지지 않는 기록을 세운 채임벌린은 NBA 역사상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차지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물론 이런 기록은 훗날 웨스 언셀드 외에는 아무도 세우지 못했다.


채임벌린은 기록의 사나이로 불렸는데 한 경기 최다 득점(100점), 최다 리바운드(55개),

한 시즌 최고 평균 득점(50.4점), 최고 평균 리바운드(27.2개)를 작성했다.

또한 통산 3만-2만(3만 득점 이상, 2만 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로

NBA 역사상 2만-2만을 기록한 선수도 없다.

또한 NBA에서 득점왕, 리바운드왕, 어시스트왕을 모두 차지했던 유일한 선수며

NBA에서 유일하게 더블트리플더블(20득점 이상, 20리바운드 이상, 20어시스트 이상)을 기록한 선수이기도 하다.

통산 트리플 더블만해도 78회인데 만약 블록슛이 당시에 기록으로 인정되었다면

쿼드러플더블도 수차례 기록했고 트리플더블 수치도 더 올라갔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통산 14시즌을 뛰면서 MVP 수상도 4차례(60, 66, 67, 68), 올 NBA 퍼스트팀

7차례(60~62, 64, 66~68), 세컨드팀 세차례(63, 65, 72), 올 디펜시브 퍼스트팀

두차례(72, 73)을 기록했다.


물론 더 많은 기록이 있지만 이 정도만하고 같이 경쟁했던 선수들을 살펴보자.

순서는 알파벳 순이고 네 시즌 이상을 상대한 선수들만 언급해본다.


첫 번째 인물은 카림 압둘자바(218cm, 121kg)는 1969년 밀워키 벅스에 드래프트 전체 1번으로 뽑혀 67-70 시즌 28.8득점, 14.5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채임벌린과는 네 시즌 동안 상대를 했다. 자바는 루키 시즌 올 NBA 세컨드팀에 들었고 이후 채임벌린과 상대한 세 시즌 동안 올 NBA 퍼스트팀에 이름을 올렸다. 이 기간 동안 채임벌린은 71-72 시즌 올 NBA 세컨드팀에 올라 노익장을 과시했다. 압둘자바는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공격무기라 꼽히는 ‘스카이 훅’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스카우 훅을 블록슛할 수 있는 선수는 채임벌린과 서먼드 정도 밖에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압둘자바는 통산 24.6득점, 11.2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채임벌린이 갖고 있던 통산 최다 득점기록을 뛰어넘어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38,387득점에 17,440리바운드를 기록했고 밀워키 벅스와 L.A. 레이커스에서 모두 6차례나 우승해 러셀의 우승기록과 채임벌린의 개인기록을 모두 섭렵한 전설로 통하고 있다.


두 번째 인물은 월트 벨라미(211cm, 111kg)다.

1961년 드래프트 전체 1번으로 시카고 패커스에 뽑힌 벨라미는

데뷔때 31.6득점, 1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했지만 불행히도

러셀과 채임벌린의 시대에 뛰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올 NBA 팀에 뽑힌 적은 없었다.

통산 20.1득점, 13.7리바운드를 기록했음에도 말이다.


세 번째 인물은 윌리드 리드(208cm, 108kg)다.

리드는 채임벌린에게는 잊고 싶은 존재 중 하나다. 1970년 NBA 챔피언 결정전에서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7차전에 깜짝 등장해 채임벌린을 상대로 점프볼을 따내고 처음 4득점을 채임벌린을 앞에 두고 기록하며 우승을 빼앗아간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964년 드래프트 전체 10번으로 뉴욕 닉스에 입단한 리드는 통산 18.7득점, 12.9리바운드를 기록했고 69-70 시즌에는 정규시즌 MVP, 올스타전 MVP, 파이널 MVP를 모두 거머쥐었다. 하지만 걸출한 센터들이 많았던 시기에 뛰었기 때문에 70년을 제외하면 68, 69, 71 시즌 올NBA 세컨드 팀에 든 것이 고작이다.


네 번째 인물은 클라이드 러블릿(206cm, 113kg)이다.

53년 데뷔한 러블릿은 조지 마이칸, 빌 러셀과 함께 뛰었던 센터로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와

보스턴 셀틱스까지 두 왕조를 거쳤고 캔사스 대학 우승, 올림픽 우승, NBA 우승까지 차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53년부터 64년까지 11시즌을 뛰며 평균 17득점, 9.3리바운드를 기록한 러블릿은 55년과 56년 올 NBA 세컨드 팀에 올랐고 세 차례 올스타에도 뽑혔는데 그 중 60년과 62년은 채임벌린과 맞대결을 펼친 것이다.


다섯 번째 인물은 가장 큰 라이벌인 빌 러셀(208cm, 100kg)이다.

‘스크리터리 오브 디펜스’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러셀은 채임벌린의 라이벌이자 가장 절친한

친구로 유명했는데 경기가 끝나면 집으로 가서 같이 저녁 식사를 한다거나 심지어 명절 때도 가족끼리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던 선의의 경쟁자였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가 뽑은 전종목 통틀어 가장 위대한 팀플레이어로 뽑힌 러셀은 모두 13시즌을 뛰며 그중 11번을 우승했던 전설이다. 1956년 드래프트에서 세인트 루이스 호크스에 뽑혀 보스턴 셀틱스로 트레이드된 러셀은 통산 15.1득점, 22.5리바운드를 기록했고 MVP만 5회(58, 61, 62, 63, 65)에 뽑혔고 올 NBA 퍼스트팀에는 3회(59, 63, 65), 세컨드 팀에는 8회(58, 60~62, 64, 66~68) 뽑혂고 올 디펜시브 퍼스트팀에는 처음으로 선정하기 시작했던 1969년 1회 선정되었다. 특이한 것은 58년, 61년에는 정규시즌 MVP에 뽑히고도 올 NBA 퍼스트팀에는 들지 못한 것인데 58년에는 센터가 뽑히지 못했고 61년에는 채임벌린에게 밀린 것이다.


여섯 번째 인물은 네이트 서먼드(211cm, 107kg)다.

서먼드는 63년 드래프트에서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에 뽑혔는데 처음 몇 시즌 동안은 채임벌린

밑에서 백업으로 뛰었고 함께 연습하면서 많은 것 특히 수비에 대한 기술을 배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NBA 역사상 단 네 명뿐인 쿼드러플더블을 기록한 선수 중 하나이자 최초로 기록한

선수인 서먼드는 채임벌린이 자신의 입으로 말한 자신을 가장 잘 막은 선수로 기록되었다.

서먼드는 통산 15득점, 15리바운드를 기록했고 NBA 올 디펜시브 퍼스트팀 2회(69, 71), 세컨드팀 3회(72, 73, 74)에 올랐고 이중 72, 73년은 채임벌린에 밀려 세컨드 팀이 된 것이다.


일곱 번째 인물은 웨스 언셀드(201cm, 111kg)다.

당시에도 센터로는 작은 신장인 201cm의 초단신 센터 언셀드는 위치 선정과 몸싸움

그리고 아웃렛패스가 빨라 리바운드가 뛰어났는데 68년 드래프트 전체 2번으로

볼티모어 불리츠에 뽑혀 루키 시즌 13.8득점, 18.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채임벌린에 이어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석권한 두 번째 선수가 되었다.

통산 10.8득점, 14리바운드를 기록한 언셀드는 5시즌 동안 채임벌린과 맞붙었는데

69년 올 NBA 퍼스트팀에 오른 것 외에는 이렇다할 수상이 없었다.

 

이런 위대한 센터들과 함께 뛴 채임벌린의 기록은 절대로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거대함에 가려진 위대함


윌트 채임벌린이라는 존재는 NBA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등학생으로 NBA 드래프트에 지명을 받았을 뿐 아니라 흑인 선수로는 최초로 진정한 슈퍼스타였기 때문이다. 물론 빌 러셀이나 돈 박스데일같은 선수들도 있었지만 이전까지 흑인 선수들은 백인스타들의 보조역할이 전부였다. 그들은 공격 1옵션이 되기보다는 리바운드나 수비같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해야 하는 것이 관례였다. 빌 러셀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는 공격보다는 수비와 리바운드, 블록슛 등 굳은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채임벌린과 엘진 베일러라는 걸출한 슈퍼스타가 팀의 간판으로 나서면서 서서히 흑인 선수들의 위력이 발휘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들은 인종차별을 극복해가면서 후배들을 위한 길을 개척한 진정한 개척자라 할 수 있다.


또한 채임벌린의 등장은 리그 판세를 완전히 뒤흔들만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리그에서는 규정을 바꾸기도 하며 채임벌린의 위력을 반감시켜보려고 노력했을 정도다. 물론 실제로 채임벌린과 상대해야 하는 구단들도 마찬가지였다. 채임벌린이 NBA에 입성할 당시는 팀 수가 적어 컨퍼런스 제도가 아닌 동서 디비전으로 나뉘어 각각 4개 팀(물론 팀의 수는 점차적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늘어났다)씩 8개 팀이 경쟁하는데 따라서 채임벌린이 속한 동부 디비전은 한해에 11번에서 13번 정도 채임벌린과 맞붙어야 했다.

이 말은 반대로 채임벌린은 빌 러셀과 플레이오프까지 많게는 20번까지 만나게 되었다는

얘기고 전회에서 소개한 전설적 센터들과는 40경기 정도씩을 맞붙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채임벌린의 기록이 당시 시대에는 그의 체격에 상대할 센터가 적었고 맞수가

적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채임벌린과 같은 디비전에 속한 팀은 당시에는 뉴욕 닉스, 보스턴 셀틱스, 신시내티 로얄스가 있었는데 보스턴의 레드 아워백 감독은 채임벌린과 한 시즌에 20번이나 전쟁을 치러야하는 러셀에게는 연습 때 힘든 훈련을 시키지 않았고 자체 연습경기에서는 혹시나 다치거나 체력이 떨어질까봐 심판을 보게 하거나 쉬게 하기까지 하였다.


뉴욕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는데 60년 드래프트에는 대럴 아임호프(208cm), 62년에는 폴 호그(206cm), 64년에는 윌리스 리드 등 센터만 줄줄이 뽑았고 결국 월트 벨라미까지 트레이드해와야 했다.


또한 그는 인간성이 훌륭하기로도 유명한데 뇌염에 걸려 갑작스럽게 전신마비가 걸려 은퇴한 모리스 스톡스 자선행사에는 매년 참석했다. 심지어 비행기가 결항하면 자동차로 10시간 이상을 달려와도 꼭 참석했고 코트 위에서는 아무리 주먹과 팔꿈치에 시달려도 단 한 번도 주먹을 날리지 않았다. 유머감각과 연예인 기질도 다분해 동료들에게는 함께 어울리기 좋은 상대였고 ‘아메리칸 밴드스탠드’같은 TV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실력을 뽐내기고 했고 ‘코난 더 디스트로이어’에도 출연했다.


또한 빌 러셀 역시 채임벌린이라는 거인을 넘어서 우승했기에 더욱 빛날 수 있었고 채임벌린과 러셀의 라이벌은 초창기 정착하기 힘들었던 NBA에는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고 보스턴 대 필라델피아의 경기는 주로 주말에 스케줄이 잡혀 TV에서도 자주 중계되기까지 했다.


이런 대단함을 지닌 채임벌린이지만 요즘 팬들에게 낮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그가 두 번의 우승밖에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의 우승이 그리 적은 수치인가? 팬들에게 위대한 선수로 꼽히는 찰스 바클리, 레지 밀러는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고 위대한 센터 중 하나인 데이빗 로빈슨, 하킴 올라주원도 두 번 밖에 우승하지 못했다. 백인의 우상 래리 버드도 우승은 세 번으로 채임벌린보다 한 번 더 많을 뿐이다.


그가 두 번의 우승에 그친 것은 러셀과 보스턴 왕조라는 걸림돌이 있었기 때문인데

러셀은 밥 쿠지(56~63), 빌 셔먼(56~61), 샘 존스(57~69), 톰 하인슨(56~65),

프랭크 램지(56~64), K.C. 존스(58~67), 클라이드 러블릿(62~64), 앤디 필립(56~58),

아니 라이슨(56~58), 베일리 하웰(66~69), 존 하블리첵(62~69) 등 11명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와 함께 뛰었다.

(()안은 러셀과 함께 보스턴에서 뛴 시즌) 무려 11명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와 함께 뛴 것

이며 한 시즌에 7명의 명예의 전당헌액자와 뛴 적도 있다.


물론 채임벌린은 엘진 베일러, 제리 웨스트(이상 레이커스 68~73), 빌리 커닝햄(필라델피아 76ers 65~68), 게일 구드리치(레이커스 70~73), 할 그리어(필라델피아 76ers, 65~68), 네이트 서먼드(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 63~65), 폴 아리진, 탐 골라(이상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59~62) 등 8명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과 뛰었지만 함께 여러 명이 뛴 기간은 적을 뿐 아니라 개개인과 뛴 시즌 역시 러셀에 비해 매우 적다.


또한 러셀에게는 NBA 역대 최고의 명장이라 할 수 있는 레드 아워백이 있었지만 채임벌린에게는 알렉스 해넘(63~68)과 빌 셔먼(71~73), 프랭크 맥과이어(61~62)같은 명장과 함께 한 시즌이 짧았다.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의 구단주 에디 고틀립도 만약 채임벌린에게 아워백이 있었다면 채임벌린도 10번 이상 우승을 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한 바 있다.


실제 러셀과 채임벌린은 평생 동안 142번의 맞대결을 펼쳤고 채임벌린이 28.7득점, 28.7리바운드를 기록했고 러셀이 14.5득점, 23.7리바운드를 기록해 1대1 매치업에서는 채임벌린이 크게 앞섰다. 물론 승패에서는 러셀이 85승57패로 앞서지만 말이다.


따라서 마이클 조던에 가려 바클리, 밀러, 패트릭 유잉이 우승을 못한 것처럼 채임벌린도 러셀과 아워백 그리고 셀틱스에게 가로막힌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그의 기록이 현재 농구와는 너무나 차이가 날 때 작성되었고 당시엔 그만한 센터가 없었으며 경력 후반기 기록은 현저히 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채임벌린은 러셀을 비롯해 전설적인 센터들과 맞대결을 펼치며 저런 대단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또한 후반기 기록은 그가 득점보다 패스와 수비에 재미를 붙였기 때문이며 제리 웨스트, 엘진 베일러같은 동료들에게 기회를 많이 만들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67-68 시즌 채임벌린의 평균 득점은 24.3점으로 크게 떨어졌지만 어시스트는 8.6개로 사승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런데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기자인 잭 카이저가 왜 득점력이 떨어졌냐고 묻자 팀이 이기는데 뭔 상관이냐고 되받아 쳤다.

그럼에도 카이저가 채임벌린이 한물갔다는 식으로 기사를 쓰자 곧바로 세 경기에서

68득점, 47득점, 53득점을 연속 기록한 후 카이저에게 “내가 아직도 한물갔다고

생각해?”라고 한 방 먹였다.

그리고 그 다음 경기에서 채임벌린은 52득점, 3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채임벌린 자신의 입을 통해 그에 대한 의구심을 풀어본다.

 

“ 많은 사람들이 내가 다른 선수들보다 많은 득점을 올린 것은 내가 다른 선수들보다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찰리 셰어나 클라이드 러블릿은 나보다 체중이 많이

  나갔고 월터 듀크스의 신장은 나와 비슷했다. 하지만 모두가 나의 성공은 나의 사이즈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때 매일 5~7 시간씩 농구를 연습했다.

  나는 농구에 대한 연구도 했고 패스하는 법, 리바운드 하는 법, 수비하는 법을 배웠다.

  또한 나는 훌륭한 육상선수였고 투포환 선수였으며 당시 다른 농구선수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웨이트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센 것은 내가 내 자신을 단련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몸을 직접 만들었다. ”  - 윌튼 노먼 채임벌린(1936~1999)

 

                                                                      최연길(MBC-ESPN NBA 해설위원)

                                                                      출처: http://blog.daum.net/gotarhe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