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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역경을 이겨낸 천재 슈터, Chris Mullin

JJun ™ 2008. 7. 16. 09:15

출처: http://blog.naver.com/rap1324/60051684896

 

여러분은 모두 농구를 좋아하실테니..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자유투 연습을 하며 가장 많이 연속으로 골을 성공 시킨 갯수가 몇 개 정도 되시는지요?
저는 아마.. 3개? 4개? 원체 슛이랑은 담을 쌓은 저인지라..

 

 

여러분이 성공시킨 갯수가 몇 개나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무려 91개의 골을 연속으로 성공시킬 확률이 얼마나 될 까요?

현역 농구선수라고 가정해도 굉장한 숫자 아닐까요?

그런데 이 사람이 한 때 알콜 중독에 빠져 한 달이상 농구공도 잡아보지 못한 선수였다면...?
정말 굉장하지 않습니까?


한 때 세인트 존스 최고의 천재 슈터로 각광 받았던..
알콜 중독에 빠져 인생의 밑바닥을 맛봤던..
그리고 그 역경을 이겨내 원년 드림팀 멤버로까지 다시 비상했던..


오늘 만나볼 『NBA 추억의 선수』는 바로

 

 

 

 

 

 

 

 

 

 

 

 

 

 

 

 

 

크리스 멀린(Chris Mullin) 입니다 !!

 

< 천재 슈터로 기억되고 있는 크리스 멀린 >

 

  

 

 

1. 세인트 존스 최고의 천재 슈터, NBA 입성

 

 

크리스 멀린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던 선수였습니다..
세인트 존스 대학시절부터 천재 슈터로 이름을 날린 그는 1984년 LA 올림픽에서

마이클 조던, 패트릭 유잉과 함께 금메달의 주역이 되기도 합니다..

이듬해인 1985년에는 NCAA 토너먼트에서는

팀을 파이널 4로 이끌기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습니다..

 

1985년 드래프트에 참가를 신청한 멀린은, 훌륭한 슛터치를 인정받고 있었음에도

작은 키와 흑인에 비해 떨어지는 운동능력 등의 이유로 인해 본인의 기대에 다소 못미치는

1라운드 7번째 순위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되며 NBA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 세인트 존스의 천재 슈터로 이름을 날렸던 멀린 >


  

 

 

  

2. 천재 슈터는 알콜 중독자가 되고

 

멀린 역시 그런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강점을 극대화시키기로 합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슈팅력"의 극대화였습니다..
결국 루키 시즌 89.6%라는 높은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하며 프로에 와서도

천재 슈터의 면모를 뽐냈습니다..

더해서 타고난 센스로 위치선정 능력이 탁월했던 멀린은

이것으로 민첩함의 결여를 커버하며 리바운드에서까지 팀에 도움을 줬습니다..
코트 전방위에서 득점포를 터뜨릴 수 있었던 폭발력은 이미 대학시절 널리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생겨났습니다..

뉴욕에서 태어나 세인트 존스 대학을 나온 멀린이

머나먼 서부의 골든스테이트로 떠나오면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족, 연인과 떨어져있다는 외로움이 멀린을 힘들게 했고

프로선수가 되고 나서 갑자기 생겨난 부와 명예는 그를 뒤흔듭니다..

결국 멀린은 술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훗날 스스로 고백했듯이 매일 밤을 술에 취해 살았습니다..

 

1987-1988 시즌의 어느 날,
당시 팀의 헤드코치였던 돈 넬슨은 멀린을 불러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술에 빠져 사는 것이 사실이냐.. 아니라면 증명해봐라.. 두 달간 금주를 해봐라..

멀린은 차마 소속팀 감독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고 약속을 했지만,
바로 그 날밤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장면이 팬에게 목격되며 넬슨의 귀에까지

그 소식이 들어가게 됩니다..

 

넬슨은 그런 멀린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멀린은 곧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넬슨은 멀린이 없는 라인업을 구상하게 됩니다..
훗날 넬슨이 말하길, 당시 자신은 멀린을 포기했었다고 합니다.. 알콜 중독을 이겨 낸 선수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세인트 존스의 천재 슈터는 알콜 중독자의 딱지를 달고 팀전력에서까지 제외되는

치욕의 시간을 보냅니다..

 

 

< 넬슨과 멀린... 어렸던 멀린은 넬슨에게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

 

 

 

 

 

 

3. 알콜 중독자는 Run TMC의 일원이 되고

 

 

팀에서 전력외 취급을 받기 시작하자 멀린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금주 단체에 가입을 하고 매일밤 자기 전 금주 지침서를 읽었다고 합니다..

 

새벽에 8km 러닝, 오전에 경사 러닝/자전거,

오후에 웨이트 트레이닝, 마무리로 400개의 점퍼와 200개의 자유투

 

어디선가 읽은,

당시 멀린이 알콜의 덫에서 빠져나와 재기를 하기 위해 이어갔던

하루 평균 트레이닝 프로그램입니다.

알콜에 빠져 허우적대던 멀린은 사라지고 연습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위기를 극복한 멀린은 다음 시즌이었던 1988-1989 시즌 평균 26.5득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냅니다..

 

 

< 스스로를 극복한 크리스 멀린 >

 

 

 

그 즈음...

워리어스는 1988, 1989 드래프트에서 나란히 두 명의 신인 선수를 드래프트 하는데

그들이 바로 미치 리치몬드와 팀 하더웨이였습니다.. 위기 뒤엔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요..

전설의 Run TMC 가 결성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최고의 공격 3인조" , "최강의 런앤건 트리오" 하면 곧장 언급되는 이들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화려함의 절정을 달리던 '킬러 크로스오버'의 주인공 팀 하더웨이,
공수양면에서 견고한 위력을 뽐내며 'Rock' 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미치 리치몬드,
코트 어디에서나 샤프한 슈팅을 작렬시키며 최고의 득점력을 뽐내던 크리스 멀린까지..

 

너무나 화려했던 1-2-3번 라인은 결성된 지 2년만인 1990-1991 시즌에,
세 선수가 모두 평균 20+득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멀린 : 25.7점 / 리치몬드 : 23.9점 / 하더웨이 22.9점)

그야말로 가장 다이나믹한 트리오의 결성이 아닐 수 없었고,

홈팬들은 이 젊은 트리오를 향해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들 이 후 한 동안 찾아볼 수 없었던 20+트리오는
지난 2007-2008 시즌, 워리어스의 후배 트리오에 의해 다시금 등장합니다..

(배론 데이비스 : 21.8점 / 몬타 엘리스 : 20.2점 / 스테판 잭슨 : 20.1점)

 

 

<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Run TMC... T.하더웨이, M.리치몬드, C.멀린 >

 

 

 

 

그리고 1992년의 여름,

크리스 멀린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그 위대한 원년 드림팀의 멤버가 되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생애 두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합니다..

 

멀린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이 비상했습니다..

 

 

< 원조 드림팀의 멤버로 활약한 멀린 >

 

 

 

  

 

 

4. 깨어진 Run TMC, 부상의 늪 속으로

 

 결성 두 시즌만에 20+트리오가 된 그들의 미래를 향한 프랜차이즈 팬들의 기대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호흡을 맞춘지 겨우 두 시즌만에 그 정도의 위력을 뽐냈으니 그 기대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겨우 두 시즌"이 Run TMC가 함께한 시간의 전부가 되어버릴 줄은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1991-1992 시즌을 앞둔 워리어스의 팬들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듣게 되니..
세크라멘토의 3번픽과 미치 리치몬드의 트레이드 소식이 그것이었습니다..

 

최소 향후 10년간은 함께할 것이라 기대했던 Run TMC는 그렇게 허무하게 해체되고 맙니다..

트레이드로 얻은 3번픽은 빌리 오웬스라는 다재다능한 포워드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당장은 넬슨의 선택이 성공적인 듯 보였습니다..

오웬스가 합류한 1991-1992 시즌,

워리어스는 릭 베리 은퇴 이 후 가장 높은 승수를 기록하며 PO에 진출합니다.. (55승 27패)
비록 PO 1라운드에서 시애틀 수퍼소닉스에 의해 탈락하긴 했지만
리치몬드에 가려져있던 사루나스 마셜리오니스가 폭발했고,

타이론 힐이 성장을 하면서 팀의 전력이 안정화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부상의 악령이 그들을 찾아온 것입니다..

 

멀린과 하더웨이가 부상으로 신음하며 팀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멀린은 엄지 손가락의 인대수술을 받으며 단 46경기 출장에 그칩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평균 25.9점을 득점해내며 이름값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가 멀린에게는 마지막 영광의 시기였습니다..

하더웨이, 멀린의 부상으로 시즌을 망친 워리어스는

덕분에 크리스 웨버와 라트렐 스프리웰 같은 젊은 영건들을 드래프트 하게 됩니다..

 

팀은 조금씩 젊어지고 있었고, 멀린은 부상에 발목을 잡히기 시작합니다..
최초 부상으로 고생했던 1992-1993 시즌 46경기 출장에 그친 이 후,
1993-1994 시즌 62경기(39선발)출장,

1994-1995 시즌 25경기(23선발)출장,

1995-1996 시즌 55경기(19선발)출장에 그칩니다..

 

1996-1997 시즌 건강을 되찾으며 79경기(63선발)에 출장하며 평균 14.5점을 득점하지만,

이미 팀 내에서 멀린의 입지는 예전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즌이 끝난 이 후, 멀린은 데뷔이 후 처음으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 또 다시 찾아온 시련 앞에 놓인 멀린.. >

 

 

 

 

 


5. 마지막 날개짓

 

 

크리스 멀린에게 제2의 기회를 준 것은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래리 버드 감독이었습니다..
한 때 버드 이 후 최고의 백인 스코얼러로 일컬어지던 멀린은 버드 감독의 지도 아래

제2의 전성기를 꿈꿉니다..

 

페이서스에서의 첫 시즌이었던 1997-1998 시즌,
82경기에 모두 선발출장하며 평균 15.3점을 득점 건재함을 과시했고
단축 시즌이었던 1998-1999 시즌 역시 50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며 평균 15.5점을 득점,

제2의 전성기를 시작하는 듯 했습니다..

 

 

< 페이서스에서의 마지막 비상 >

 

 

하지만 이내 잔부상이 그를 괴롭혔고,

2000-2001 시즌을 앞두고 친정팀인 워리어스로 돌아온 멀린은
총 20경기(8선발)에 출장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합니다..

 

 

 

멀린의 커리어를 돌아보면 한 편의 농구 영화와도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일찌기 천재 슈터로 주목받던 젊은 선수가 프로 무대에 데뷔하며 전혀 낯선 곳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고,

거기에서 방황을 겪으며 알콜 중독자가 되지만 불굴의 의지로 재기에 성공, 대활약을 펼치며 비상..

결국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 금메달까지 목에 걸게 되었지만 예기치 않은 부상을 입게 되고,

재기를 노리지만 부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무렵, 다른 팀으로의 이적을 하게 되고..

결국 화려하게 부활하지만 얼마가지 못해 다시 부상에 발목을 잡힌 그는,
친정팀으로 돌아와 조용히 은퇴를 한다..

 

 

정말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 같지 않습니까?

알콜 중독마저 이겨낸 불굴의 사나이,
인생의 밑바닥을 맛본 뒤 그 위기를 이겨내며 원년 드림팀 멤버가 된 사나이..


 

 

 

오늘의 주인공, 크리스 멀린이었습니다..

 

Chris Mullin (1986-2001)

생애통산 986경기 출장(822 선발)
평균 18.2득점, 4.1리바운드, 3.5어시스트, 86.5% (자유투 성공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