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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의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던 2005년 12월 어느 날, 필라델피아 76서스 선수들은 그들 앞에 선 한 위대한 선배를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통산 최다 공격리바운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이 선수가 팀 리바운드 19위에 그치고 있던 후배들을 위해 특별 강의를 자청하고 나선 것이죠.
당시 필라델피아에는 빅맨 출신 코치가 없었기 때문에, 사무엘 달렘베어 같은 젊은 빅맨들은 선배의 가르침을 경청했습니다. 포지션 차지를 위한 몸싸움 요령부터 리바운드 후 패스 방법까지 모든 과정을 시범을 보이며 설명한 51세의 이 레전드는, 선수들과 함께 리바운드의 모든 과정을 포스트의 모든 위치에서 50번씩 반복했습니다. 선수들은 서서히 안색이 변해갔지만, 그는 ‘이 정도도 못하면 나랑 같이 연습할 자격이 없다’며 가차없이 후배들을 다그쳤습니다.
마침내 주저앉아 가뿐 숨을 몰아쉬는 후배들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그는 ‘리바운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근성과 자신감‘이라고 내뱉았습니다.
한때 리그 최강의 선수였던 사나이, 모제스 말론은 현역 시절 못지않은 탄탄한 몸을 움직여 웨이트 트레이닝장으로 향했습니다.
빈민가에 피어난 해바라기, 보드를 쳐다보다
Moses Eugene Malone은 1955년 3월 23일, 버지니아 주의 작은 도시인 피터스버그의 빈민가정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소년 모제스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농구를 시작했고, 곧 농구의 재미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모제스는 밤새도록 혼자 농구 연습을 하기 일쑤였고, 부모님은 그런 모제스를 밤새도록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걱정과 상관없이 코트에서 엄청난 운동능력을 발휘한 모제스는 피터스 고교 재학 시절 팀을 50연승으로 이끄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몇 년 앞서 UCLA로 진학한 빌 월튼의 뒤를 잇는 전국구 고교 스타로 자랐습니다.
유명인이 된 말론은 한 대학의 서머 캠프에 초청받아 대학 선수들과 함께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선수들이 점심 먹으러 간 뒤에도, 모제스는 혼자 체육관에 남아 공격리바운드 연습을 했습니다. 그는 볼을 백보드에 여러 각도로 튀겨가며 점프를 계속했고, 가끔 연습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 대학 감독 딕 비테일은 모제스에게 왜 공격리바운드 연습만 하고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모제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코치를 바라보며 대꾸했습니다.
“감독님, 일단 공을 잡아야 슛을 하잖아요.”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 선수들은 아무리 뛰어난 성적을 보여도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제스는 자신의 어려운 가정 형편을 잘 알고 있었고, 대학에 가서 장학금을 받느니 곧바로 프로에 진출하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환경이 모제스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최초의 고졸 스타
몇 년 전인 1969년, 당시 미국 프로 농구 리그를 양분하고 있던 NBA와 ABA는 UCLA 출신의 슈퍼 루키 카림 압둘-자바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NBA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인 25만 달러를 1년차 연봉으로 제시하며 자바를 유혹했고, ABA는 한 술 더 떠서 아예 백지 수표를 던졌습니다. 카림은 드래프트 픽에 상관없이 어느 팀이든 선택할 수 있었으며, 입단 후 카림의 연봉은 ABA의 모든 팀이 같이 부담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죠. 하지만 카림은 결국 NBA에 입단했고 ABA는 분루를 삼켜야 했습니다.
절치부심한 ABA는 전국의 유망주들을 아예 고교 시절부터 입도선매해 버리기로 결심했고, 그 첫 번째 주자로 모제스 말론이 선택된 것이죠. 말론은 1974년 드래프트 3라운드에서 유타 스타스에게 고교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지명되었고, 유타는 그의 몸값으로 5년 간 무려 300만 달러의 거액을 제시했습니다. 평균 60만 달러는 카림의 루키 시즌 연봉보다도 한참이나 높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던 것이죠. 게다가 말론이 ‘프로 리그 따위는 금방 제패할 수 있다’는 뜻의 발언을 했기 때문에, 말론과 팀은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검증되지 않은 고졸 루키에게 큰돈을 썼다’는 맹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말론은 자신의 실력을 믿고 있었으며,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프로에 뛰어들었습니다.
대망의 첫 시즌, 자신만만한 소년 말론은 평균 18.8득점과 14.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참새들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하지만 재정 상태가 악화된 유타는 이듬해 파산했고, 말론은 팀의 에이스인 론 분과 함께 세인트루이스 스피릿으로 팔려가야 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리그 자체가 파산하면서, 말론은 파산 드래프트를 통해 NBA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모세, 골밑을 가르다
처음 말론을 지명한 팀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였습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센터이던 빌 월튼을 보유하고 있던 포틀랜드는 굳이 말론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말론은 버펄로 브레이브스를 거쳐 휴스턴 로케츠에 새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당시 휴스턴은 팀을 이끌던 ‘미스터 디펜스’ 루디 톰자노비치와 ‘원조 마이티마우스’ 캘빈 머피를 비롯하여, 나중에 명감독이 되는 존 루카스 등이 뛰던 리그의 중위권 팀이었습니다. 당시 주전 센터이던 케빈 커넛과 함께 골밑을 책임지게 된 말론은, 시즌 평균 13.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금세 휴스턴 골밑의 수호신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무렵 말론의 프라이드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리그의 대표적인 고참 저니맨 한 명이 휴스턴에 입단했는데, 그는 자신의 번호인 24번을 달고 있는 말론에게 번호를 양보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팀 관계자들이 모두 나서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새까만 후배 말론은 등번호를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고참 선수는 항의의 표시로 홈 경기에는 2번을, 원정 경기에는 4번을 달고 뛰었다고 합니다.
일단 리그에 적응한 말론은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1978~79 시즌 평균 24.8득점 17.6리바운드로 생애 첫 MVP를 차지했으며, 1981~82 시즌에는 평균 31.1득점, 14.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매직 존슨을 제치고 두 번째 MVP를 수상했습니다. 말론은 208cm라는 그리 크지 않은 신장의 소유자였지만 센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민첩했으며, 한 발 빠른 스텝을 이용한 몸싸움에도 능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한 의지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런 장점은 그를 특히 리바운드의 최강자로 만들어 줬죠. NBA 첫 해에 리그 3위를 기록했던 그의 리바운드 순위는 이듬해 2위, 그 다음 해에는 다시 1위로 올라갔습니다.
말론의 리바운드 기록에서 특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공격 리바운드 능력인데, 그는 어디서 점프하면 최고점에서 안전하게 공을 따낼 수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수비수의 박스 아웃이 심해도, 공과 자신 사이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달려가 공격리바운드를 잡아냈습니다.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것 같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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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베이스라인을 따라 달려들어가는 리바운드에 능했습니다. 휴스턴에서 뛰던 시절, 그는 경기당 7개 내외의 공격리바운드를 잡아내는 터무니없는 보드 장악력을 보여줬습니다. 공격리바운드의 달인인 데니스 로드맨이 가장 많은 공격리바운드를 잡은 1991~92 시즌 기록이 6.4개인 것을 생각하면, 말론의 기록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죠.
말론의 성장과 더불어 휴스턴 역시 서서히 성장해갔습니다. 머피와 톰자노비치의 팀이었던 휴스턴은 말론의 팀으로 변해갔으며,
1980~81 시즌에는 디펜딩 챔피언 레이커스를 1라운드에서 때려눕히는 등 파란을 거듭한 끝에 파이널에까지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휴스턴은 엘빈 헤이스 같은 슈퍼스타를 영입했음에도 머피와 톰자노비치의 공백을 극복하지 못했고, 말론은 팀의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다섯 시즌 동안 두 번 MVP에 선정된 리바운드 머신은 우승을 위해 팀을 옮기기로 했고, 이때 필라델피아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1937년 창단된 유서깊은 명문 구단 필라델피아 76서스는 유난히 우승에 한이 많은 구단이었습니다. 60년대 윌트 체임벌린이라는 최고의 선수를 보유하고도 빌 러셀의 보스턴에 번번이 막혀 단 한 번 우승에 만족해야 했으며, 70년대 중반까지 약팀의 수모를 겪었습니다. 1976~77 시즌 ‘농구의 베이브 루스’라 불리던 줄리어스 어빙을 데려와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빌 월튼의 포틀랜드에 패했고, 1980년 파이널에서는 센터로 변신한 매직 존슨의 괴물 활약에, 1982년 파이널에서는 카림 압둘-자바의 대활약에 눈물을 흘려야 했죠. 결국 센터가 문제였습니다. 칼드웰 존스와 대럴 도킨스의 더블포스트가 나름대로 잘 해주기는 했지만, 파이널 상대팀의 슈퍼스타급 센터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죠. 게다가 같은 동부 컨퍼런스에서는 로버트 패리쉬와 래리 버드가 이끄는 보스턴이 필라델피아를 위협했습니다.
결국 필라델피아는 카림에 대항할 빅 센터를 찾아야 했고, 당시 리그에서 카림과 필적하는 선수는 말론밖에 없었습니다. 필라델피아 단장 팻 윌리엄스는 말론을 데려오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유계약선수가 된 말론은 필라델피아와 거액의 오퍼 시트 계약을 맺었습니다. 휴스턴은 그 정도 금액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고 그대로 말론을 빼앗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 필라델피아와 같은 조건으로 계약 후 트레이드를 선택했습니다. 결국 말론은 칼드웰 존스 및 1983년 1라운드 드래프트 픽과 트레이드되어 필라델피아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이 트레이드 결과 말론을 내준 휴스턴은 시즌 14승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필라델피아에서는 리그 역사상 손꼽히는 슈퍼 듀오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Fo, Fi and Fo'
마지막 퍼즐을 찾은 필라델피아는 승승장구했습니다. 말론이 인사이드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지칠 줄 모르는 리바운드 능력을 발휘하면서, 기존 멤버들의 골밑 부담은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줄리어스 어빙은 시즌 평균 21.4득점을 기록하며 올 NBA 퍼스트팀에 뽑혔고, 평균 19.7득점을 기록한 앤드류 토니는 특히 라이벌인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맹활약 하여 영화 제목에서 따온 '보스턴 교살범(The Boston Strangler)'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포인트가드 모리스 칙스는 평균 6.9어시스트의 안정적인 리딩과 2.4스틸의 숨막히는 수비력을 앞세워 상대 가드를 쉴새없이 압박했고, 그 해 신설된 '올해의 식스맨'상의 첫 수상자가 된 식스맨 바비 존스는 압박으로 따낸 볼을 속공으로 연결시키며 말론, 칙스와 함께 7번째로 올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뽑혔습니다. 마크 이바바로니는 파워포워드로써 말론을 보조했으며, 클린트 리차드슨과 클레몽 존스는 능력있는 식스맨이었습니다. (참고로 '올해의 수비상'의 첫 수상자는 밀워키 벅스의 시드니 몽크리프)
말론은 평균 24.5득점과 리그 1위인 15.3리바운드를 기록했습니다. 그의 골밑 움직임이 어찌나 좋았던지 팀 동료들의 공격이 막히면 그냥 말론에게 공을 주기만 하면 될 정도였습니다. 공을 받은 말론은 여지없이 득점을 성공시키거나 파울을 얻어냈기 때문이죠. 그는 시즌 788개의 자유투 시도와 600개의 자유투 성공에서 모두 리그 1위에 올랐습니다. 또한 말론은 동료 선수들을 이끄는 리더쉽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보면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론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오히려 동료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말론은 시즌 MVP에 선정됐고, 각기 다른 팀에서 2년 연속 MVP를 수상한 유일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시즌 MVP와 수비왕, 두 명의 All NBA 퍼스트 팀 멤버와 세 명의 All NBA 디펜시브 퍼스트 팀 멤버, 네 명의 올스타 멤버를 보유한 필라델피아는 무적 그 자체였습니다. 필라델피아는 정규 시즌 65승 17패를 거둬 리그 1위에 올랐고, 평균 득점 마진 7.9점의 여유 있는 경기를 펼쳤습니다.
당시 컨퍼런스 별로 6개 팀이 출전하여 1,2번 시드는 1라운드를 부전승으로 통과하던 리그에서 필라델피아는 당당히 동부 1번 시드를 받아 2라운드에 진출했습니다. 플레이오프 예상을 묻는 기자들에게, 말론은 예의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유명한 한 마디를 내뱉었습니다.
"Fo(ur), Fo(ur) and Fo(ur)."
시리즈를 모조리 스윕하며 우승하겠다는 자신만만한 선언이었죠.
2라운드에서 버나드 킹과 빌 카트라이트가 버틴 뉴욕을 4-0으로 잠재운 필라델피아는 컨퍼런스 파이널 4차전에서 시드니 몽클리프와 마르케스 존슨의 밀워키에게 일격을 당하기는 했지만 4-1의 압승을 거두고 파이널에 진출, 그동안 번번이 눈물을 삼키게 했던 레이커스와 맞붙게 되었습니다.
당시 레이커스는 매직-카림 듀오 외에도 민완 가드 놈 닉슨, 득점력 있는 포워드 자말 윌크스, 그리고 식스맨 포워드 듀오인 베테랑 밥 맥아두와 2년차 제임스 워디를 앞세워 시즌 58승으로 서부 컨퍼런스 1위를 차지한 강팀이었습니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에서 제임스 워디를 잃었고, 이는 필라델피아에게는 좋은 조짐이었습니다.
홈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113-107의 승리를 거둔 필라델피아는 2차전도 103-93의 낙승을 거두고 로스엔젤레스로 향했습니다. 1차전에서 이미 어깨 부상을 당했던 레이커스 주전 가드 놈 닉슨이 무릎 부상으로 완전히 나가떨어진 3차전 역시 111-94의 승리를 거둔 필라델피아는 4차전에서 밥 맥아두까지 부상으로 잃은 레이커스의 마지막 파상 공세에 힘든 경기를 펼쳐야 했습니다.
경기 종료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간, 두 점 차로 간신히 앞서가던 필라델피아의 빌리 커닝햄 감독은 타임아웃을 불러 말론에게는 수비를, 어빙에게는 공격을 주문했습니다. 코트에 들어가자 마자 어빙은 7연속 득점을 쓸어담았고, 말론의 굳건한 수비와 리바운드로 115-108의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비록 플레이오프에서의 1패로 ‘Fo, Fo and Fo’가 아닌 ‘Fo, Fi and Fo’가 되긴 했지만, 파이널에서 숙적 레이커스를 스윕한 필라델피아는 환호했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 ‘믿어지지 않는다’며 소감을 밝힌 커닝햄 감독은 ‘지난 해와 달라진 점은 말론의 영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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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 팀의 골밑에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레이커스는 항상 카림으로 인해 득을 봤지만, 올해는 우리가 말론 덕을 봤다. 우리는 NBA 타이틀까지 모제스를 타고 달렸다’며 승리의 일등공신으로 말론을 지목했습니다. 실제로 말론은 파이널 네 경기에서 카림을 압도했습니다. 특히 리바운드에서는 72-30의 압승을 거뒀죠. 레이커스가 자랑하던 ‘Show Time'은 말론의 리바운드 때문에 'Slow Time'으로 전락했으며, 시즌 평균 110.6득점을 기록하던 공격력도 파이널에서는 100.5득점으로 10점 가까이 하락하고 말았습니다.
포스트시즌 평균 26득점 15.8리바운드를 기록한 말론은 파이널 MVP에 선정되어 정규 시즌 MVP와 파이널 MVP를 독식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말론에게는 자타공인 최고의 자리에 올라 리그를 호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는 태양, 진한 노을
다음 해에도 말론의 활약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1984~85 시즌까지 5년 연속 리바운드왕 타이틀을 독식했고 올스타와 올 NBA 팀에도 계속 선정됐습니다. 하지만 어빙과 다른 멤버들은 서서히 쇠퇴기를 맞고 있었고, 필라델피아는 더 이상 파이널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1985~86 시즌을 마친 직후, 리빌딩을 선언한 필라델피아는 말론과 테리 커트리지, 2라운드 지명권을 워싱턴으로 보내고 제프 럴런드와 클리프 로빈슨을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습니다. 워싱턴에서 말론은 '수단 딩카족 추장집의 231cm짜리 아들' 마누트 볼과 함께 골밑을 책임지며 두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는 여전히 20득점과 10리바운드를 기록할 수 있는 올스타 센터였지만, 2년 연속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에게 패하는 등 더 이상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1988~89 시즌, 자유계약선수가 된 33세의 말론은 애틀랜타에 입단하여 ‘휴먼 하이라이트 필름’ 도미니크 윌킨스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한때 최고의 에너지를 자랑했던 선수와 당대 최고의 에너지를 자랑하는 선수의 결합으로 관심을 모은 이 조합은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미 리그는 ‘4대 센터’가 지배하고 있었고, 말론의 실력은 이제 완연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애틀랜타에서의 두 번째 시즌에 말론은 11년 만에 처음으로 시즌 평균 20득점에 실패했습니다. 올스타 선발에도 탈락했습니다. 급기야 계약 만료 시즌인 1990~91 시즌, 애틀랜타 신임 감독 밥 웨이스는 존 콘캑을 주전 센터로 기용하고 말론을 벤치에 앉혀버렸습니다. 데뷔 이래 줄곧 선발로 뛴 말론에게 이보다 심한 굴욕은 없었습니다. 백인 센터 콘캑은 1984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는 했지만 선발로 뛰면서도 말론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이죠. 자유계약으로 풀린 말론은 미련없이 이적을 결심했습니다.
필라델피아 시절 라이벌이었지만 이제 약체 팀으로 전락한 밀워키와 계약한 말론은 첫 시즌 주전 센터로 출전해 시즌 평균 15.6득점 9.1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슈터 데일 엘리스와 현재 KBL 코치인 가드 제이 험프리스, 수비수 앨빈 로버트슨 정도로는 당시 최고의 격전지였던 센트럴 디비전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이듬해 등 수술로 11경기만을 출장한 말론은 이제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했지만, 친정팀 필라델피아가 다시 말론을 불렀습니다. 1993년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영입한 거인 센터 션 브래들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죠. 찰스 바클리를 피닉스로 보낸 뒤 리그 최약체 팀으로 전락한 친정팀에서, 말론은 한 시즌 동안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했습니다.
한 시대를 지배한 영웅
1994~95 시즌, 에이스 센터 데이비드 로빈슨의 보조가 필요했던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말론과 계약했습니다. 하지만 40세의 말론은 17경기만을 출장한 뒤 종아리 근육 파열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팀에서는 재활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스스로 은퇴했습니다.
오늘날 최고의 센터를 논할 때 우리는 항상 카림 압둘-자바나 윌트 체임벌린을 먼저 떠올리지만,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의 NBA를 지배한 선수는 분명히 모제스 말론이었습니다. 1978~79 시즌부터 1982~83 시즌까지 다섯 시즌 동안, 말론은 MVP 3회, 우승 및 파이널 MVP 1회, 올 NBA 퍼스트 팀 3회, 세컨드 팀 2회, 올 NBA 디펜시브 팀 2회, 올스타 5회에 선발되었습니다. 리그의 어느 누구도, 카림조차도 말론을 막지 못했던 거죠. 만약 카림이 자신보다 뛰어난 선수라고 하면, 말론은 아마 화를 낼 겁니다.
그는 ABA 시절을 포함하면 무려 21시즌이나 플레이했으며, 통산 27,409득점(평균 20.3)과 16,212리바운드(평균 12.3)를 기록하여 커리어 평균 20득점-10리바운드를 기록한 몇 안되는 선수 중 하나입니다. 말론은 또한 NBA 사상 두 번째로 많은 자유투를 시도하여 가장 많은 자유투를 성공시켰으며, 세 번째로 많은 경기를 출장했고, 열 번째로 많은 필드골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기록은 공격리바운드입니다. 말론은 통산 6,731개의 공격리바운드(평균 5.1)를 잡아내, NBA가 공격리바운드를 따로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공격리바운드를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기록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지난 시즌 가장 많은 공격리바운드를 기록한 선수가 평균 3.7개를 기록한 벤 월러스인데, 그보다 훨씬 많은 공격리바운드를 20시즌 넘게 잡아내야 하니까 말이죠.
이번 시즌 말론은 필라델피아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정식 취임했습니다.
그동안 서머리그 감독직에 만족한다고 말해왔던 말론이 어째서 NBA로 돌아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빅맨 출신 어시스턴트 코치가 없는 옛 동료 모리스 칙스 감독의 부탁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자신이 유일하게 우승 트로피를 안은 팀이 부진에 허덕이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분명한 건, 필라델피아의 젊은 빅맨들이 말론의 지도에 따라 골밑에서의 움직임을 익힌다면, 몇 년 내로 팀의 골밑은 다른 어느 팀보다도 높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말론은 선수 시절 한 명의 위대한 리바운드를 길러낸 경험이 있습니다.
1984년 찰스 바클리는 입단하자마자 말론을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고,
말론은 이 ‘건방진 뚱보’를 리그에서 가장 위대한 리바운더 중 하나로 키워냈죠.
누구든지 자신감을 표현하기는 쉽습니다.
‘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죠.
하지만 그런 자신감을 실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제스 말론은 항상 자신이 최고라는 자신감을 지녔으며,
그런 자신감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계속한 선수였습니다.
농구할 때 득점을 하고 싶지만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말론의 충고를 귀담아 들어보시기 바라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공격리바운드를 잡은 것은, 바로 슛 찬스가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성자:heltant79 / 2006-10-2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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