껄끄럽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수긍하지 못하겠다면 버티라 회사 협박은 재취업에 걸림돌
“당신은 명예퇴직 대상자입니다.”
20년 가까이 다닌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이런 휴대전화 메시지를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외환위기 이후 인력 구조조정이 상시화됨에 따라 월급쟁이들은 한번쯤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려 볼 것이다.
더구나 최근 삼성전자가 대규모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 등 기업에 구조조정 칼바람이 다시 부는 분위기다. LG필립스LCD는 4월까지 300명의 희망퇴직을 끝냈으며, LG전자는 본사 직원의 약 40%를 생산·영업현장으로 전환 배치해 명예퇴직 신청자가 늘 것으로 전망된다.
온라인 취업정보업체 잡코리아가 최근 1053개 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24.9%가 ‘인력 구조조정을 계획 중이거나 현재 진행 중이다’라고 답했다. 특히 대기업은 30.6%로 가장 높았다.
명예퇴직은 대부분 회사의 경영 상황이 악화됐을 때 이뤄지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회사가 내건 조건을 아무런 반발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퇴직하는 것은 너무 ‘이타(利他)적’이다. 명퇴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도움말 주신분: K 노무사(익명 요구), 고민주 노무사, 정철호 코리아헤드 대표)
◆협상을 하라=직장 상사로 모시던 분들과 퇴직 조건을 놓고 협상을 한다는 건 분명 껄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현실 앞에선 냉정해야 한다.
특히 명퇴를 당하더라도 여러 명이 함께 당한다면 그나마 ‘행운’이라고 봐야 한다. 모이면 협상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협상으로 무엇을 얻어야 할까? 퇴직금을 높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간혹 명퇴자에게 기본급 18개월치를 준다고 하다가 협상 과정에서 20개월이나 22개월로 늘리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 대기업에서나 볼 수 있는 예외적인 일이다. K노무사는 “기업들이 이전에 명예퇴직을 한 사람들과의 형평성을 신경 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협상을 통해 현실적으로 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교육과 의료보장이다. K노무사는 “한 중견기업이 작년에 3차례의 명예퇴직을 했는데 1차, 2차는 그냥 퇴직금만 받고 나갔지만, 3차 때는 직원들이 뭉쳐 회사와 협상을 해 6개월 이상의 학자금 보조를 이면계약으로 더 얻어냈다”고 말했다.
회사로부터 퇴직 후 홀로서기에 도움이 되는 권리를 얻어낼 수도 있다. 명퇴한 한 대기업 부장은 회사 차량을 팔 때 이를 장부가보다 낮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해 허락을 받기도 했다. 물론 모든 협상은 사직서를 쓰기 전에 끝내야 한다. 사직서를 쓴 후에는 어떤 협상도 효력이 없다.
◆협박은 미친 짓이다=‘내가 회사의 비밀을 알고 있는데…’란 생각은 쉽게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그러나 명확한 증거도 없이 회사를 협박한다면, 오히려 업계에서 매장당해 재취업조차 불가능해진다.
고민주 노무사는 “그런 생각으로 상담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지만 성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오히려 협박범이란 불명예만을 뒤집어쓸 수 있다”고 말했다. 회사가 타격을 받을 정도의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회사측이 자를 생각도 안 한다는 설명이다.
◆도저히 수긍을 못하겠다면 버티라=굴욕을 참을 수 있다면 버티는 것도 방법이다. 명퇴 대상자가 끝까지 사인을 하지 않으면 회사가 자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K노무사)
A은행의 인사 담당 임원은 “한 사람을 적법하게 자르기 위해서는 근무가 태만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최소한 3년치는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버티는 사람에게는 회사가 보직을 주지 않거나, 연고도 없는 지방 근무를 명할 수도 있다. 현재 판례상으로는 회사의 이 같은 인사 조치가 정당한 경영 활동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많다.
◆퇴직 전에 사내 원수와 화해하라= 퇴직 후 성공적인 이직을 위해서는 사내 인간 관계 회복이 중요하다. 헤드헌팅 업체인 코리아헤드의 정철호 대표는 “퇴직 전에 직장 내 원수와 화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히 거래 관계가 있는 중소기업으로 옮기려 시도할 경우 ‘원수’가 일일이 나서서 방해를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지금껏 갑(甲)의 입장에 익숙해진 대기업 간부라면 퇴직 후 ‘을(乙)’의 입장에 서는 훈련부터 해야 한다. 정철호 대표는 “고개를 90도 이상 숙이는 을의 입장에 서지 못해 중도 탈락한 선배들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의 경쟁사가 나의 가장 훌륭한 이직 창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충고했다.
[조의준 기자 joyjun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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